아프리카 여성운동가 Njoki Wainaina

"양성 평등은 모든 사람이 요람에서 태어나고 무덤에서 죽을 때까지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아프리카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가 중 하나인 Njoki Wainaina(은조키 와이나이나)의 강력한 주장이다.

그는 여성들이 급진적인 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는 사회 속에서, 소외되고 빈곤한 여성의 권리를 찾는 데에 헌신하고 있으며, 1988년 세워진 아프리카여성개발소통네트워크(FEMNET)의 의장을 역임했다.

와이나이나는 남성의 지배가 당연시됐던 케냐의 전통적인 작은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성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던 그의 부모는 그와 형제 자매들에게 '남성과 여성이 기본적으로 동등하다'고 가르쳤다.

그의 아버지는 여성의 할례를 강력히 반대했다. 여성의 할례가 비록 뿌리깊은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을지라도, 그의 아버지는 그것이 남성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아프리카 시골 마을에서 그의 부모가 했던 이러한 "특이한" 교육은 와이나이나가 양성 평등을 믿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FEMNET에서 일하기 전 그는 성 건강과 임신에 관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제계획부모연합(IPPF)의 책임자로 근무했다. IPPF에서 그는 단체를 통해 여러 국가 간에 협력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고, 여기서 쌓은 경력은 FEMNET의 기초를 다지는데 밑거름이 됐다. 또 그는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가 처한 상황과 그들에게 닥친 문제점에 대해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로 인해 그는 FEMNET에 부과된 프로젝트들을 잘 수행할 수 있었고, 이는 1995년 열린 베이징 의회에서 빛을 발했다.

이에 대해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베이징 대회는, 우리도 함께 무언가를 해낼 수 있고 여성의 기본권을 지키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아프리카의 활동가들이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는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베이징에서 열린 대회는 그로 하여금 남성들도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남성 활동가들은 여성들의 격하된 지위가 여성 자신들에게 불공평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불안정을 가져온다고 언급했다. 그 후 그는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있어 남성의 역할을 구체화하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베이징 그 후 10년"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는 사회가 여성 활동가뿐 아니라 좀 더 영향력 있는 방법으로 여성의 권리를 지지하고 촉구할 수 있는, 즉 견고한 통계치와 이론을 제공할 수 있는 여성학 학자들 역시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지금 이 시점에 없어서는 안 될 행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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