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우리반에는 특정 아이돌 그룹을 두고 상반된 평가를 하는 팬과 안티, 두 무리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대상에 대한 진정한 평가라기보다는 소모적 논쟁에 가까워 보였다. 그 그룹에 대해 정확히 판단하려는 노력없이 무작정 자신의 주장에 맞는 근거만을 내세웠던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로 인한 오류는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얼마 전 민족문제연구소와 뉴스툰(전국시사만화 작가모임) 등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행각·군부독재 등 비판적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는 ‘만화 박정희’를 출간했다. 이에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은 이것을 ‘박근혜 죽이기’로 판단, 박정희의 새로운 면모를 주제로 한 ‘인간 박정희’를 계획 중이라고 한다. 사실 오래 전부터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우리 사회에서 민감한 사안 중 하나였다. 객관적인 잣대에 의해 이뤄지는 평가가 아닌 ‘경제발전의 신화’· ‘친일독재자’라는 극과 극의 수식어만이 그를 따라다녔던 것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이념속에서 긍정적으로 이미지화 된 인물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관용을 베풀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회복 불가능한 비판을 퍼붓고 있다. 이런 오류는 우리 역사 속 인물들을 영웅 혹은 반역자로 양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정 대상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을 방해하고 비생산적 논쟁만을 부추기게 된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진보학계 대표인사인 서울대 백낙청 명예교수의 ‘박정희 공과(功過)에 대한 객관적 평갗 발언은 환영할 만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해왔던 그가 지나치게 한 면만을 들추는 것은 소모적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평가는 특정인에 대한 단편적 지식만을 제공할 뿐이다. 감정적으로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기 보다 균형잡힌 시각으로 건강한 논의를 해야한다.?

지금 우리는 마치 쇳덩이만을 끌어당기는 자석처럼 자신이 원하는 관점으로만 대상을 단정짓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한 답을 찾고자 한다면 편협한 사고의 틀은 내던져야 마땅하다. 자신의 관점에 맞는 사실만을 취한다면 대상에 대한 평가 자체의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정확한 판단’은 두 논점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진검승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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