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축제 시즌인 5월, 우리 학교도 20일(금) 대동제를 마무리했다. 1886년 5월31일 이화의 창립을 기념하기 위해 1908년 시작된 첫 축제부터 창립 119주년 기념으로 이뤄진 올해 대동제까지, 각 시대별 이화 축제의 발자취 속으로 들어가보자.

1908년 5월의 여왕 대관식과 운동회로 구성된 우리 학교의 첫 축제는 ‘메이데이’라 불렸다. 초대 메이퀸은 설립자였던 스크랜턴 부인이, 1927년 이전까지는 유공자·존경받는 선생님들이 퀸으로 선출됐다. 이후 일제 때, 곧은 자세·아름다운 걸음걸이를 강조하면서 ‘자세여왕’ 선발로 성격이 변했다. 그 후 6·25 때 중단된 메이데이는 1956년 부활했다. 5월31일 ‘메이데이’에 펼쳐지는 여왕대관식은 일간지에도 크게 보도될 정도였으나, 여성의 상품화를 초래한다는 이유로 1978년 폐지됐다.

60~70년대는 가장행렬·댄스파티 등 서구적 축제 형태로 바뀌게 된다. 학생들의 가장 큰 관심을 받은 프로그램은 1천500∼2천 커플 정도를 초대했던 쌍쌍파티였다. 남성 출입이 제한돼 있던 당시 남학생들은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열심히 파트너를 물색했다고 한다. 신창훈(51세)씨는 “금남의 구역이었던 이대는 남학생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미지의 세계였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쌍쌍파티를 위해 학교 앞 양장점에서 옷을 맞추고 춤을 배우는 것이 유행하면서 사치스럽고 유흥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80년대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생산적·독창적인 대학문화의 창조를 목표로 ‘우리는 하나’라는 의미를 지닌 대동제로 명칭이 바뀌었다.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대동제는 마당극과 놀이패가 중심인 민속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이에 83년 10월 가을대동제부터 영산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또 80년대 후반부터는 대동제에 정치적 색채가 가미돼, 정치적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학생운동의 절정기였던 89년, 21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이귀혜(신방·93년 졸)씨는 “풍선을 터뜨리는 행사에서도 구호를 외쳤던 그 때의 축제는 재미있지만 의미있는, 대학생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존재했다”고 평가했다.

90년대 대동제는 ‘민중연대’를 목표로 삼았으나 그 노력으로 마련된 ‘연대장터’가 음식과 물건만을 사고 파는 ‘장터’로 변질되는 등 원래 의미가 퇴색됐다. 이에 대학 축제가 음식냄새와 호객행위로 난잡해지고 동아리·학과의 유흥비용에 이용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김말복 교수(무용 전공)는 “축제의 낭만이 사라지고 상업적인 면에만 치중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한편 96년에는 고대생들의 난동으로 이화인 한 명이 크게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성주체적 문화’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일어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DJ 레이브 파티 등의 새로운 행사가 인기를 끌었지만 이외의 행사는 참여가 저조해 전반적으로 참여율 문제도 야기됐다.

이렇게 대동제가 점점 이화인들의 외면을 받으면서 학생들이 다양하게 참여할 수 있는 ‘참여형 컨텐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 점에서 최근 몇 년과 비교해 이화인들의 참여가 많았던 이번 대동제는 가능성을 보여준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영산 줄다리기를 위한 줄꼬기 작업 등에는 학생들의 참여가 낮아, 축제 ‘준비’부터 이화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계속해서 요구되고 있다. 약 100년 동안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한 이화 축제, 앞으로는 ‘새로운 컨텐츠 개발·전통문화계승·참여’의 세 요소가 어우러지는 것이 이화 대동제의 과제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