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5월 열린 광주민주항쟁 기념 집회 중에서 [사진:이대학보 소장 자료]
5·18 광주민주항쟁 이후 25년이 흘렀다. 1980년대 대학가의 민주화 열기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잊혀진 역사가 됐다. 군부독재로 얼룩진 70∼80년대, 이화의 모습은 어땠을까.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안숙(시청각교육·84년 졸)씨와 지하조직에서 학생운동을 한 홍영희(사회·81년 졸)씨를 만나 5·18 전후 이화의 민주화 투쟁에 대해 들어봤다.


1970년대 후반은 박정희 전(前)대통령의 퇴진과 민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대학가의 민주화 투쟁이 활발했다. 우리 학교 지하 운동권 조직들은 연일 시위에 참여하며 사회의 민주화를 꿈꿨다. 채플 시간에 학생들이 강단에 올라가 민주화를 외치다 제지당했고, 옥상에서 ‘군부정권 퇴진’·‘노동권 보장’을 외치는 유인물을 뿌렸다. 숱한 선배들이 시위를 벌이다 잡혀가 투옥됐다. 유인물 한 장 배포하다 걸려도 8개월∼1년 형을 살고 학교에서도 제적되는 시기였다.

당시에는 경찰들이 학내에 상주하며 운동의 주동자를 색출했다. 홍영희 선배는 ‘넥타이 맨 남자들이 중앙도서관을 돌아다니던’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경찰이 현장에서 주동자를 체포하려 할 때 옆에 있던 이화인들이 힘을 합쳐 주동자를 탈출시키는 경우도 많았다”고 전했다.


광주가 피로 물든 1980년의 봄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하야를 기점으로 전국 대학가의 학생운동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이화에도 민주화의 염원이 관통했다. 이화인의 손으로 선출한 학생회를 만들자는 목소리도 커졌다. 당시 학생대표단체는 교수 임명으로 선출된 학도호국단이었기 때문이다.

▲ 안숙 선배(시청각교육 84년 졸) [사진:박한라 기자]
학생회 선거 결과 안숙 선배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됐다. 안숙 선배는 당시 결성된 학생회에 대해 “학내 단체에서 건의한 의견들을 수렴하고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과정이 체계적이었다”고 전했다. 홍영희 선배 역시 “우리 학교는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공식적 운동과 지하에서 이뤄진 비공식적 운동의 연계가 잘 이뤄졌다”고 말한다.


학내에서는 매일 토론의 장이 열리고 시위가 진행됐다. 시위단이 정문 밖으로 가두시위를 시도할 때 대기하고 있던 전경들은 최루탄을 쐈다. 전체 학생 8천명 중 1천∼6천명의 이화인이 매일 시위에 참여했다.

1980년 5월 초에 가정관에서 있었던 철야농성은 이화 민주화 항쟁의 정점이었다. 2천명이 넘는 이화인들은 가정관 식당을 메우고 일주일 이상 진행된 농성에 참여했다. 운동권 학생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투쟁이 일반 이화인에게까지 불길처럼 퍼진 결과다. 홍영희 선배는 “의식은 있지만 마땅한 창구를 찾지 못하던 이화인들이 벌떼처럼 일어난 것”이라며 “소수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던 민주화 투쟁에 새로운 활력을 줬다”고 회고했다.


5·18 즈음해 대학가 운동권은 큰 시련을 겪었다. 5월17일 경찰들이 우리 학교 가정관

▲ 홍영희 선배(사회 81년 졸) [사진:박한라 기자]
에서 열린 ‘전국총학회장단회의’에 습격해 학생들을 무작위로 잡아간 것이다. 이 사건으로 각 학교 운동권 학생들의 소통체계가 흐트러져 학생운동이 주춤했다.

안숙 선배는 “현장에서 붙잡힌 사람도 있고 일부는 유리창을 깨고 도망갔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당시 수배령이 내려져 2개월 동안 도피하던 안숙 선배는 졸업식날 제적을 당해 그 후 3년 반 동안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5·18 광주민주항쟁이 대학가에 알려진 것은 외국신문에 게재된 기사나 사진을 통해서다. 당시 사진을 유포하다 적발돼 구속된 홍영희 선배는 “계엄령으로 학교를 비롯한 모든 조직들이 폐쇄돼 이에 대항할 통로가 사라진 상태였다”며 억압적인 시대 분위기를 전했다. 안숙 선배는 “서울의 봄이 피려다 다시 졌다”며 안타까운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하지만 민주화를 향한 학생운동의 행보는 쉼없이 계속됐고 민주화를 위한 그들의 노력은 1993년 문민정부의 탄생으로 꽃을 피웠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화도, 이화인들도 많이 변했다. 이화인들이 집결했던 이화광장은 주차장이 됐고 운동장은 곧 사라져 ESCC가 들어선다. 하지만 대학생의 사회적 역할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민주적인 사회를 위해 투쟁한 70∼80년대 이화인들처럼 2005년의 사회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현재 이화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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