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앞 거리, 내 또래로 보이는 한 무리의 여성들이 지나간다. 스치는 바람결에 그들의 대화가 들린다. “나 우울해!”
그렇게 단말마의 비명이 내 귓가에 남았다. 나 우울해.
언제부턴가 우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디서든 하루에 한 번 이상 우울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실을 토로하자면 불과 얼마 전까지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감수성이 극도로 예민해지던 고등학교 시절 이후 우울증에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웃지 않았고 세상의 짐을 다 짊어진 듯한 표정으로 “우울해 죽을 것 같아”를 연발하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와 다른 사람들 모두 뭐가 그렇게 우울한 걸까? 딱히 우울한 상황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확실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내 입에서는 습관처럼 우울하다는 말이 새어 나왔다. 진짜 우울해서 우울하다는 말을 하게 되는 건지, 우울하다는
말을 하기 때문에 우울해지는 건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내 감정상태를 탐구하기에 이르렀고, ‘제임스-랑게 이론’이라는 심리학
이론을 찾아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정서가 신체 생리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신체 반응이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즉, 슬퍼서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눈물이 나서 슬퍼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앓고 있는 우울증 역시 ‘우울하다’고 말하는 순간 생기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이런 사실을 간파한 뒤에 나는 한 가지 재미있는 실험을 시작했다. ‘우울하다’는 말 대신 ‘행복하다’고 말하고 우울한 감정에 몰입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를 연구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내가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행복은 아니지만 급변하던 감정의 회오리가 사라지고 잔잔한 일상의 평화가 찾아왔다.
빈번한 자살과 흉흉한 범죄들 속에서 사람들은 세상이 우울하다고 말한다. 우울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우울해지는 것이라고.
그렇지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우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현재의 상황에 대한 푸념만을 늘어놓을 뿐,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사람들은 우울해지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우울하다’는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나는 행복의 전도사도 아니고, 달라이라마처럼 ‘행복론’을 설파하는 현자도 아니다. 다만 나는 ‘우울하다’라는 생각을 ‘우울하지만 어떻게
행복해질까’로 전환시킨 사람이다. 그 작은 전환이 내게 행복을 가져왔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 믿는다. 마냥 감정에
빠져있다가는 그것에서 헤어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불유쾌한 상황을 벗어나려는 의지다. 지금 이 순간, 우울함을 외치는 그대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내일도 우울할 생각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