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첫째 주 기획이었던 ‘학내 비정규직 노동자의 실태’를 취재하며 나는 수없이 익명기재를 요구 받았다. 아예 취재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비정규직 노동자인 취재원들이 학교 측으로부터 당할 불이익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열심히 의견을 피력해준 취재원들이 모두 ‘어떤 비정규직 노동자’로 에둘러 표현됐다.


조직이 개인의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사회 전반의 일이다. 최근, 교수들의 연구비 횡령 사실을 폭로했던 연세대 독문과 김이섭 강사가 뚜렷한 이유 없이 이번 학기 강의를 맡지 못해 문제가 된 바 있다. 재작년 금감원에 자신이 근무했던 금융회사의 불법행위를 고발한 김승민(35세)씨 역시 일방적으로 해고되고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 당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강요된 침묵을 깬 것에 대한 단죄를 받은 것이다.


조직의 인사이더인 그들이 낸 용기는 조직의 감춰진 비리를 사회에 드러내는 데 크게 공헌한다. 내부인의 고발은 ‘조직의 평화(?)’를 저해할지는 몰라도 ‘사회의 발전’에는 기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은 왜 스스로를 감추거나 검열해야 하는가. 이는 “말 잘못 했다가 나 짤리면 어쩔꺼냐”는 한 경비 아저씨의 푸념처럼 사실의 폭로가 그들의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내부고발자가 조직 내부의 비리나 모순을 밝혔을 때 이에 대한 조직의 대처는 냉혹하기 그지없다. 가장 일반적인 보복방식이 생계기반을 통째로 흔드는 해고니 말이다.


개인의 존립기반을 위협하는 조직의 횡포 앞에서 개인은 침묵할 수 밖에 없다. 내부의 모순을 가장 잘 아는 것이 내부인인데, 그들의 입을 막으니 상처가 안에서 곪아 터진다. 공익을 위해 밝혀져야 할 얘기들은 안주거리로 소진되거나 인터넷이란 익명의 공간에 넋두리로 떠다닌다. 이것이 이 사회에 뿌리 내리고 살아가려 애쓰는 인사이더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하지만 조직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인사이더들에게 조직을 위한 침묵을 강요한다고 해서 내부의 비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자리를 빌미로 개인을 위협하고 개인은 조직의 비리를 눈 감아주는 억압적 공생관계가 지속된다면, 비리의 싹은 계속 자라나 결국 조직 전체의 자멸을 초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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