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자생이론 정립 등과 함께 각 분야의 전문화 이뤄야

“지식인들이 배알이 없고 어리석다”
사상가이자 민권운동가인 함석헌 선생은 서양의 이론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얼이 썩은’ 지식인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이 땅에 태어난 지식인으로서 우리의 얼이 담긴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는 학자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지난 2001년 ‘자생학문’으로서의 주체성을 회복하고 서구 학문의 종속성을 극복하자는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우학모)’이 만들어졌다.

‘우리말로 학문하기’란 영어·한자 등으로 사용된 학술 용어를 우리 고유의 일상언어로 바꿀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드러내는 ‘자생이론’을 정립하고, 그것을 세계에 알리려는 연구 활동을 말한다.

이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한국외대 이기상 교수(철학 전공)는 “우리가 몸으로 부대끼는 삶 속에서 앎을 얻을 때, 삶은 더욱 풍요로워진다”며 “우리의 이론을 정립하고 한 발 더 나아가 그것을 세계화 시키는 것이 우리말로 학문하기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4집까지 발간된 「우리말 철학사전」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탄생된 성과물이다. 이 사전에는 ‘예술’·‘인간’ 등 12개의 우리말 개념의 뿌리가 들어있다. 이기상 교수는 “서양의 경우 ‘Culture’라는 낱말을 통해 단어의 어원을 추론할 수 있는데 반해 우리는‘문화’라는 낱말이 누구에 의해 어떤 의미로 사용됐는지도 모른채 서양 사전 속 의미를 그대로 베껴 쓰고 있다”며 「우리말 철학사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국어학에서도 한자어로 된 학술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이 진행돼왔다. 상명대 최기호 교수(국어교육 전공)는 “학술용어로 ‘존재’라는 낱말 대신 우리말 ‘있음’을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밝혔다.

‘심리학’·‘민속학’등에서 우리의 생활에 바탕을 둔 이론을 정립해온 것 역시 이 모임을 통해 맺어진 결실이다. 중앙대 최상진 교수(심리학 전공)는 “흔히 정신분석학·심리학에서 거론되는 외디푸스 컴플렉스의 경우 서양인의 삶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정서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며 ‘홧병’·‘체면’ 등 한국인의 생활 속에 녹아있는 감정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우리 민족 특유의 삶의 지혜가 녹아있는 신화에 주목해온 이기상 교수의 연구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서양의 신화는 가부장적인 구조이지만 우리 전통 신화에는 여성인 ‘할머니’가 생명을 주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며 그 특징을 설명했다.

그는 “우리에게 할머니란 존재는 ‘정’으로 갈등구조를 해결해 주고,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한’을 삭히는 삶의 표상”이라며 이를 통해 감싸안음과 어울림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학모는 집담회를 통해 제시된 이러한 논의 외에도 인문·교양 잡지 「사이」를 발간해왔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창립 당시의 열기와는 달리 우학모의 활동은 여전히 학계의 비주류로 인식되고 있다. 가톨릭대 박일영 교수(종교학 전공)는 “현재 모임 안에서도 산발적이고 개별적인 움직임만 있을 뿐, 의견이 결집된 공동작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림대 김영명 교수(정치외교학 전공)도 “정치외교학계 역시 미국의 정치학 이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몇 학자들만이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라며 활동의 저조함을 드러냈다.

최근 우학모의 소극적인 움직임에 대해 최상진 교수는 ‘선진국의 학문이 정통이고 우리의 것은 비정통’이라는 일부 지식인들의 열등의식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많은 학자들의 경우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는 하이데거가 독일의 일상언어로 철학 용어를 만드는 데에는 아무런 말이 없으면서 우리나라 철학자들이 우리말로 철학을 하면 ‘무슨 근거냐’고 반박하는 것이 그 예다.

게다가 「사이」 역시 2003년 가을호를 끝으로 더 이상 발행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이기상 교수는 “대학원생들을 독자층으로 염두해두었으나, 전공 분야에서 벗어난 이러한 움직임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이 적어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이기상 교수는 “지금까지는 ‘우리말로 학문하기’가 이뤄져야만 하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힘썼다”며 “앞으로는 지금까지 쌓아온 명분을 근거로 각 분야에서 전문화·구체화 작업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이 모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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