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때도 이렇진 않았어”

4월27일(수) 오후10시. 대형 쇼핑몰·도매 상가가 밀집한 동대문에 노점 상인들이 하나 둘씩 나와 가판을 세우고 전등을 밝히기 시작했다. 외국인도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는 동대문 야시장의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야시장은 오후10시부터 다음날 새벽3∼4시까지 열린다. 지방에서 물건을 떼러 온 도매 상인부터 쇼핑을 하러온 일반 손님들까지 동대문 야시장은 환한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룬다.

그러나 정작 도로를 따라 일렬로 늘어선 포장마차 안은 손님이 1∼2 테이블 정도만 차있다. 길거리 포장마차 장사만 27년째라는 김모(65세)씨는 “불경기라 말도 못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1만원 어치를 먹던 손님도 요즘은 5천원 어치만 먹고 가버려 벌이가 시원찮다는 것이다. 그는 “장사만 잘되면 힘들어도 기분 좋지만 밤새 일해봤자 들어오는 것은 없다”며 “손님들 끌려고 소리 지르다 우리 마누라는 목 수술을 해야할 지경”이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노점 상인은 물론 상가 안 상인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평화시장은 물건을 사러 온 손님을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한산했다. 간혹 값싼 물건을 사러온 러시아나 중국 사람들이 몇몇 보일 뿐이다. 특히 성인복 매장은 손님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부모들이 아이들의 옷은 사지만 돈을 아끼려고 자신들의 옷은 사지 않기 때문이다.

평화시장에서 5년째 캐쥬얼 여성복을 판매하는 김영아(35세)씨는 “작년에도 경기가 안좋았는데 올해는 더욱 심각하다”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내수는 물론 수출도 부쩍 줄어들어 매출이 몇 년 전에 비해 30%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값싼 물건과 비교했을 때 가격경쟁에서 밀리는 것이다. 그는 “상인회에서 매출을 올리기 위해 광고를 하고 대책도 마련하지만 당장에 소비 심리가 없으니…”하며 말끝을 흐렸다.

신평화시장에서 의류 도매업을 하는 양금자(58세)씨도 “다섯 가게 중에 한 가게 꼴로 적자”라고 한탄했다. 야시장이 거의 파하는 새벽3시 무렵, 그의 앞에는 여전히 많은 옷가지들이 쌓여있었다. 지방에서 물건을 떼가는 중도매·소매 상인들의 발걸음이 뜸해졌기 때문이다. “돈 많은 놈들은 모두 끌어내야 해. 자기들 잇속 챙기기에만 바쁘고 서민들만 죽는거지 뭐”라고 힘없이 말하는 그의 모습에는 사회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깊게 배어 있었다.

야시장의 하루가 끝나는 새벽. 희뿌연 안개가 가득한 거리는 주변 대형 쇼핑몰 폐장 시간에 맞춰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시각 가게 바닥에 구부리고 앉아 새우잠을 청하는 동대문 상인들의 뒷모습이 유난히 더 작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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