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경 교수(법학 전공)

늦어지는 봄을 기다리고 있는 요즈음, 새내기들이 대학교정을 활기차게 가득 메우면서 또 한학기가 시작되고 있다.

내게도 80년대 중반 간발의 차이로 채플시간에 늦어 대강당 문이 닫히던 날이면, 계단 아래 서 있던 신단수 밑에서 친구를 기다리던 대학시절의 기억이 남아있다. 강의가 있는 날이면 그 나무 밑에 모여서 무거운 전공서적을 들고는 수많은 이야기와 함께 법과대학 건물로 올라가곤 했었다.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읽고 난 느낌도, 전공책 속의 수많은 학설대립과 판례 얘기도, 친구들의 애정사도 그 길 사이에서 오고 갔었다.

대학생활이 뭔지도 모른 채 대학생이 된 것만으로 분주하던 당시의 모습 속에는 모든 것을 경험하고자 하던 젊은 날의 욕심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함께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과는 달리 여유있어 보이는 시간 속에서의 낯선 무력감과 초조함, 자유와 자율이라는 상황 속에서 고민하던 외로움, 시대적 갈등과 의견충돌 속에서 작게만 느껴지던 소수의 목소리들, 그 사이에서 이곳이 그렇게 가야만 하고 가기만 하면 된다던 대학이란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도대체 대학은 무엇인가라는 수많은 의문 속에서 이곳이 나에게 대학생으로서의 기회만 제공해줄 뿐 나머지 부분은 스스로 채워가야 하는 소중한 장임을 깨달은 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대학시절은 나에게 희망하고 계획했던 것만이 전부는 아니며 생각지 않았던 실패나 고통, 실수 등이 오히려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조그만 실패나 타인의 비판에도 주춤거리던 나 자신에서 벗어나 불확실하지만 가고자 하던 길로 갈 수 있도록 용기를 길러준 것도 그 시절이었다.

중앙도서관 가득한 책들을 바라보며 이중 몇 권이나 읽고 졸업할 수 있을까 하면서 책으로부터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도 대학시절이었다. 최루탄과 구호 속에서 인간이 가지는 자유의 소중함을 깨달았던 것도 그 시절이다. 그리고 사람과의 만남이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지만 그러한 관계와 만남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 것도 이 때다.
그 당시에는 몰랐었다. 때로는 막연하게 느껴질 뿐 뭔가 명확하게 주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 답답해하고, 스스로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물어대던 정체불명의 시절이 그렇게 중요한 시간이었는지를 말이다.

이제 나는 다시 대학에 있으면서 많은 학생들의 소중한 대학시절의 작은 한 부분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 젊음과 열정을 가지고 학문에 정진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대학시절이 미래를 향한 풍요로운 기회와 경험의 장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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