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하철에서 겪은 일이다. 내 앞에는 한 남자가 보통 사람 2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다 차지한 채 앉아 있었다. 공교롭게도 내 옆에는 한 할머니와 몸이 불편한 그의 딸이 서 있었다.

힘들어하는 모녀의 모습은 내 앞에 앉아있던 그의 눈에도 분명 비쳐졌겠지만 그는 양보의 기색을 보이긴 커녕 오히려 널브러져 앉으려는 것이 아닌가. 다혈질인 성격상 당장 멱살을 잡고 ‘XX야 넌 부모도 없냐? 빨리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최대한 정중히 말을 건넸다.

“저기요, 옆에 할머니께 자리 좀 양보해 주실 수 있으세요?”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칸으로 가버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지하철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면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저 여자 웃긴 여자네’하는 표정으로 내 행동을 비웃고 있던 것이었다.

순간 난 내 행동에 대한 회의감과 동시에 ‘여성·노약자를 위한 칸’이란 문구가 또렷이 보였다.

당시 내 행동은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의 심경을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주위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정도로 몰지각한 행동이었던 것일까. 비록 우리 사회가 ‘바른 말 하는 사회’는 아닐지라도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 정도는 형성돼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믿음은 거짓이었단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지하철’이란 특수한 공간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는 아니다.
한 나라의 국정을 좌우하는 국회에서도 당리를 따지지 않고 민생 안정을 위한 발언을 하는 사람은 소속된 당이나 넓게는 정치판에서 왕따를 당하기 십상이다. 재계에서도 투명한 기업 운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소리 소문 없이 매장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심지어 초·중·고교 수업 시간에서 교사의 질문에 대답을 한 학생은 곧 친구들에게 ‘잘난 척’을 이유로 비난을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사람들이 바른 말·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맹공격을 퍼붓는 것은 대개 그로 인해 자신의 치부나 무지가 들어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교사의 질문에 답변한 학생을 ‘잘난 척’한다고 비웃는 것도 답을 한 학생이 교사에게 인정받는 것과 동시에 나머지 학생들은 무지하다고 판명될 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사회 전체에 해를 가하거나 특정 개인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행위는 도덕성 혹은 합리성을 근거로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지적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려는 행위에 대해 덮어 놓고 비난하는 행태는 더 이상 용인돼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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