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마감을 끝내고 미친 듯이 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 너머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학생, 오늘 내가 한마디 해야겠어. 이번 달 과외 제대로 한 적있나?”
아차. 신문 마감한답시고 과외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것이다. 생각해 보니 과외하기로 한날 가지 않고, 심지어 핸드폰까지 꺼놓았던 것이다. 아주머니의 질책은 약 30분으로 끝났지만 ‘책임지지 못할거면 하지 말았어야’라는 말은 하루종일 비수로 꽃혔다.

다음 날 나는 과외비를 돌려드리겠다고 말씀 드렸다. 그렇게 한다면 나의 잘못도 어느정도 덜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돈 대신 남은 과외를 해달라’는 뜻밖의 반응이었다. 순간, 나는 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말에 그것을 만회할 방법을 찾은 것이 고작 과외비 돌려주는 것이란 말인가. 나는 한낱 돈으로 잘못을 덮으려 얄팍한 수작을 부린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비단 과외만 그랬던 것 은 아닐 것이다. 내 생활의 대부분이 알게모르게 이같은 수작을 부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대학에 들어와 대부분의 시간을 학보사 기자로 보낸 나는 선배들에게 들은 첫 번째 얘기가 ‘자신의 바이라인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니 학보사를 지원할 때도 자기 소개서에 ‘끝까지 책임 지겠다’고 썼던 기억이 난다. 1년 반 동안의 기자생활을 되돌아 봤다. 나는 과연 기자로서 내가 맡은 일을 확실히 책임졌던가. 소명의식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가 맡은 것에 최선을 다했다는 기억이 자신있게 나질 않는다. 취재가 힘들면 선배들에게 의지하기 일쑤였던­현재 내가 후배들에게 절대 그런 기자가 되지 말라고 강조하던­ 최악의 모델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학보사 기자로 남은 마지막 한 학기, 지금 나는 학보사 전반의 모든 일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기댈 곳도 일을 전가할 곳도 없다.
기사 아래 나가는 기자의 이름 바이라인,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요즘들어 절실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몇달 간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됐기 때문이다.

한 조직의 책임자에게는 그 어떤 변명이나 수작도 용인 되지 않는다.
이제 나의 바이라인은 나가지 않지만 이대학보 기자들 전체의 바이라인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다. 공적인 학보사 일은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주머니의 질책처럼 직접적인 화살이 날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미안하다며 과외비만 돌려주려 한다면 ‘책임지지 못할 거면 하지 말라’ 던 아주머니의 매서운 말 한마디 처럼 더 무서운 질책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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