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후 판자촌 확산

‘두꺼바~두꺼바 헌집줄게 새집다오~’ 구전 전래 동요의 내용처럼 우리 학교 주변·신촌 일대의 판자촌(무허가 불량주택)들이 하나 둘 씩 재개발돼 새 건물로 바뀌고 있다. 이 같은 우리 학교 주변의 판자촌은 어떻게 생겨나 현재와 같은 모습을 하게 된 것일까.

한국 전쟁 중 정부는 난민 수용을 위한 긴급 대책으로, 도시 계획이 실시되면 언제든지 철거한다는 조건 하에 무허가건물 건축지대를 허가했다. 그러나 전쟁 후 조건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서 이 지역은 집단적 불량주택지역으로 남게됐다. 한편,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으로 급격히 늘어난 도시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정부는 50년대 후반 창천동 주변에 입식 주거지를 건설한다. 그 결과 점차 사람들이 몰리게 되고 그 주변에 대규모 판자촌이 들어섰다. 윤인숙 도시연대 정책센터장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신촌에 판자촌이 들어온 시점을 50~6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70년대 우리 학교 주변은 판자촌 일색이었다. 김혜숙 교수(철학 전공)는 그 당시 풍경에 대해 “현 럭키 아파트 자리에 판자촌이 형성돼 있었다”고 회상했다.
80년대 말~90년대 초 사람들이 아파트를 선호하게 되면서 판자촌 일대에 아파트 재개발 사업이 활발해진다. 철거 과정에서 철거자와 철거민의 폭행 사건도 빈번히 일어나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학생들의 데모가 일어났다. 우리 학교 송희준 교수(행정학 전공)는 “장상 총장이 취임하던 해인 96년 이전까지는 우리 학교 주변에서도 재개발 반대를 위한 학생 데모 운동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현재도 대현동 럭키 아파트 뒷편 너머를 경계로 연탄을 때는 방 한 칸 짜리 판자촌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외숙 교수(통계학 전공)는 “수요피켓시위를 통해 아직까지 남아있는 판자촌의 존재를 확인했다”며 “이렇게 가까운 곳에 눈에 띄지 않게 판자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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