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치기소년의 가르침
466
때는 8월6일 오후11시 경. 귀를 찢는 듯한 소음이 시작됐다.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온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날이었다. 걸레를 내던지고 손바닥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소리의 진원지는 내 방에 있던 화재경보기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건물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도 온통 미간을 찌푸린 채 귓구멍을 틀어막고 있었다. 입은 옷도 각양각색. 모두 자신이 하던 일을 뒤로 한 채 본능적으로 건물 밖으로 뛰어나온 것이다. 딱 봐도 알람오작동이 분명했다. 화재가 발생했다 하기엔 연기는커녕 냄새도 나지 않았다. 여기도 기계가 잘
여론광장
서현정(커미·15)
2018.09.16 23:39
-
나는 이방인으로 남기로 했다
1071
보통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면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고등학교 때부터 프랑스어를 전공한 내 목표는 ‘프랑스인이 되기’였다. 내 정체성을 지워버리고 프랑스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해, 남들이 나를 그 나라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그러나 교환학생으로 7개월간 살며 느낀 프랑스는 결코 천국은 아니었다. 느린 행정처리와 잦은 파업, 노상방뇨 등 프랑스인들의 무책임한 태도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인종차별이었다. 내가 동양인의 ‘생김새’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고 야유했
여론광장
김기이(불문·16)
2018.09.10 07:34
-
더불어 살아가자며?
706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대해 배운다. 우리는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다른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야 할지 논의하며, 그들을 존중하는 법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배운다. 하지만, 현 실상은 이런 아름다운 존중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얼마 전 보도되었던 대전 길고양이 사건을 기억하는가? 대전에서 1000마리에 달하는 길고양이를 상습적으로 죽여온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지만, 아무런 처벌을 할 수 없었던 사건이다. 이 남성은 8년간 길고양이가 싫다는 이유만으로 쥐약을 탄 음식을 곳곳에 놓아 1000여
여론광장
권유진(사회·18)
2018.09.10 07:33
-
Not history but Herstory
461
8월 14일, 세계‘위안부’기림일에 영화 ‘허스토리’(2018)를 관람했다. 의미 있는 날인만큼 감독과 연출, 배우 김희애가 참석해 관객과의 토크형식으로 GV가 진행됐다. 그 중 인상 깊었던 두 가지에 대해 글을 써보고자 한다.첫 번째, 사회가 (엄마)에게 부여하는 죄책감이다. 극 중 주인공 친구는 워킹맘이며 ‘위안부’ 할머니들을 도우려는 주인공을 말린다. 일하지 말고 집에 있는 딸이나 잘 돌보라는 것이다. 그저 자식이 소위 말하는 ‘바른’길을 가지 않으면 손가락질하며 ‘이게 다 엄마가 애를 제대로 못 돌봤기 때문이야’라며 엄마의
여론광장
최승은(정외·15)
2018.09.03 19:24
-
객관성의 객관성의 객관성의...
700
우리는 모두 바쁘다. 기존에 세워져 있는 기준에 부합하려고 바삐 움직이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할 때 상처를 받는다. 우리는 죽을 만큼 노력해서 평범해지려 하고, 자신이 보편·타당한 사람임을 증명하려 애쓴다.‘객관성. 주관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대상 자체에 속하여 있는 성질.’ 객관성의 사전적 정의다. 우리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객관성을 찾아 울부짖는다. 누군가가 무엇에 내린 판단에 대해 이것이 과연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본 판단인지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그렇게 수없이 의심해서 얻어진 객관적인 산물을 우리는 믿었건
여론광장
김혜진(영문·16)
2018.09.03 19:24
-
여성, 뉴욕, 1998
553
드라마 ’섹스앤더시티’는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뉴욕에 사는 4명의 여성 이야기를 그린 미국 드라마이다. 이미 오래전에 유행이었던 이 드라마를 나는 요즘에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조금 더 일찍 이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면 정말 좋았을텐데. ’섹스앤더시티’는 20년 전 쯤의 이야기이지만, 이 드라마를 보면 18년도의 서울보다 진보한 부분이 훨씬 많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98년도라는 것은 감안하고 보아야한다.) 우선 제목부터가 그렇다. 아직까지도 한국에서는 미디어에서 일상 생활으로서의 섹스를 논할 수
여론광장
정단비(국문·14)
2018.06.04 00:42
-
‘오늘의 임산부를 맞이하는 핑크카펫’
749
‘내일의 주인공을 맞이하는 핑크카펫’ 통학을 위해 올라탄 지하철에서 마주친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새겨진 이 문구는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분명 이 좌석의 존재 이유는 교통약자인 임산부를 위해 비워두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좌석 위 문구에서 칭하는 ‘내일의 주인공’은 지금 그 자리에서 대중교통 이용에 어려움을 느끼는 임산부가 아닌, 앞으로 태어난 뱃속 태아를 지칭하는 말로 해석된다. 짧은 문구지만 임산부는 이로 인해 타자화된다. 산부 스스로 좌석에 앉을 ‘권리’를 지니는 것이 아닌 뱃속의 태아의 존재 덕에 배려받는 ‘대상’으로
여론광장
이소원(국문·17)
2018.06.04 00:36
-
장애인을 배제하는 언어인가요
3199
누군가가 말했다. ‘존재를 지우는 사회에서, 소수자의 존재를 가시화해야 한다.’ 다른이가 반응했다. ‘그런데 가시화라는 말은 시각장애인 배제적 용어예요. 대체어를 찾아보아요.’ 또 다른이는 ‘본다, 듣는다는 말도 그러면 다 사용할 수 없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했고, ‘아 근데 그거는 채식하는 사람에게 식물, 미생물은 안 불쌍하냐고 묻는 느낌인데’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Leave No One Behind.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다양한 투쟁들이 있다. 추상적 고민들 속에서 어느 지점을 변화시키려 할지 판단해야 한다. 가시
여론광장
김미현(커미·15)
2018.05.28 09:05
-
우리에겐 왜 취미가 없을까
854
일본어 회화 수업에서 새로운 학생이 오면 늘 자기소개를 한다. 벌써 같은 자기소개를 30번도 넘게 했지만 매번 가장 흔히 물어보는 질문이 취미가 무엇이냐이다. 사실 이 질문은 초등학교 이후 늘 받던 질문이고 한 번도 고민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야 취미가 없으니까. 과연 나만 그런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면 결국 독서, 음악감상, 영화 감상 이외의 취미를 가진 사람은 소수다.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본여행에서 서점을 방문할 때마다 수많은 취미 관련 서적과 잡지들을 보면서 어쩐지 부러워진다. 요리, 정원 가꾸기, 자전거, 운
여론광장
황지현(건축공학·16)
2018.05.28 09:00
-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2311
“선생님, 김소월이 여자가 아니에요?“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던진 질문이다. 국어를 관심 있게 배웠던 학생이었다면 한 번쯤 들었던 의문일 것이다. ‘소월’은 얼핏 봐도 여자 이름인데다 그의 시를 ‘여성적 어조’로 설명하는 참고서 해제가 많기 때문이다. 국어 과외를 하며 3번 정도 받은 질문이라 “응. 본명은 김정식이야.“ 라고 대답해줬다. 그런데 뒤이어 물어오는 학생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왜요? 왜 김소월인데요?“ 집에 가서 찾아보니 소월은 한자로 素月, 흰 달을 의미한다. 유년 시절
여론광장
서현정(커미·15)
2018.05.21 00:11
-
졸업해도 졸업하지 못한 것
776
“학생! 오른손을 허리에 놓고 옆구리를 조금 더 틀어 봐요. 아니 좀 더! 그렇지!“ 화창한 5월이 되면 ECC 꼭대기 공터는 졸업사진을 찍는 학생들로 북적인다. 이화에 발을 처음 딛던 새내기 시절, 예쁘게 차려입은 선배들이 하얀 네모 단상에 올라가 사진을 찍는 모습을 오며가며 구경하는 것은 봄날의 소소한 재미였다. ‘언젠가는 사진을 찍을 날이 오겠지’ 하며 지나치던 그 장면들 속에, 어느덧 나도 졸업예정자가 되었다. 촬영 공지 문자를 받았을 때는 나도 드디어 졸업사진이라는 것을 찍게 되었다는 사실에 마냥 설렜지만, 막상 사진을 찍
여론광장
김지원(언론·14)
2018.05.20 23:55
-
지금 스트레스 받는 당신에게
489
“스트레스 받아” 라는 표현은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쉽게 사용하는 말 중 하나일 것이다. 할 일이 좀 많고, 신경이 거슬리는 일 전반에 사용한다. 하루에도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열 번도 넘게 생기고, 그걸 상대해 내는 일상을 산다. 바쁨을 토로하면서도, 은근히 이를 뽐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뽐내는 말이라고 해도 심신이 피폐해지지 않는다는 건 전혀 아니다). 성실하게 커리어를 쌓아가는 젊은 현대인이라면 당연한 삶이다. 나 역시도 그런 의미들로 사용해왔던 것 같다. 지금은 스위스에서 4개월 차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곳에서 ‘
여론광장
김지원(환경공학‧15)
2018.05.14 03:07
-
노인은 다른 종족이 아니다
515
얼마 전 EBS 다큐프라임 ‘황혼의 반란’을 봤다. 노인들이 30년 전으로 돌아가 일주일 동안 그때처럼 생활하고, 그 변화를 측정하는 프로그램이었다. 30년 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까? 처음 다큐를 봤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자기 자신을 추억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무슨 효과를 창출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영상을 보는 동안 계속 놀라움을 느꼈다. 일주일 동안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 생활하면서 그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게 되었고, 그것은 신체능력과 인지기능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나 역시 노
여론광장
정혜주(심리‧16)
2018.05.14 03:03
-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해도 돼
1359
제 대학시절의 단짝은 불안감이었습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지금 빨리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사회적 압박감이었습니다. 25년간 그 누구도 저에게 “천천히 해”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해야만 하는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고, 취업이 아니면 대학원, 고시 준비 등 얼른 빨리 자신의 길을 선택하라는 무언의
여론광장
정단비(국문·14)
2018.05.07 02:18
-
당신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587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컴퓨터 공학과입학 3년차. 그동안 나는 게임 개발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두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올해는 부회장이 되어 동아리 일을 관리하게 됐다. 저 말은 지난 2년을 지내며 선배에게 많이 듣고, 후배들에게 많이 하게 된 말이다. 사실 특별한 말은 아니고, 아주 평범한 인삿말이다. 의미는 말
여론광장
송주은(컴공·16)
2018.05.07 02:15
-
이게 내 취향이야
584
‘너 다이어트해?’ 내게는 너무나도 피곤한 말이다. 그냥 어쩌다 보니 고구마, 닭가슴살, 샐러드, 요거트 종류를 가장 좋아할 뿐인 내가 고등학교 때 급식 대신 이런 것들을 싸서 다니면 선생님도, 친구들도 걱정된다며 내게 와서 한마디씩 이런 말들을 의구스러운 눈빛과 함께 던졌다. 그 때마다 아니라고, 그냥 이런 음식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여론광장
김우정(교공・16)
2018.04.01 23:24
-
화장실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881
십 년 전 지하철 대부분의 장애인 화장실은 남녀공용이었다. 성별 이분법에 얽매이지 않은 다양성을 고려한 ‘성중립 화장실’을 의도한 건 아니었다. 장애인의 성을 무시해서였다. 장애인을 무성적 존재로 여기고, 성별을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남녀가 뭉뚱그려졌던 장애인 화장실은 여자 장애인 화장실과 남자 장애인 화장
여론광장
김미현(커미・15)
2018.04.01 23:20
-
검은 눈으로 세상을 본다
862
“사람의 눈은 흰 부분과 검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왜 검은 부분으로 세상을 보는 것일까?” “그것은 세상을 어두운 면에서 보는 편이 좋기 때문입니다. 밝은 면에서 보면 지나치게 자신에 대해서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기 때문에 그로 인해 교만해지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대담으로
여론광장
서현정(커미‧15)
2018.03.25 22:52
-
“당신은 당신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나요?”
444
인간은 서로 무수히 많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공유한다. 이들은 서로의 비슷한 모습을 반가워하고, 다른 모습에서 갈등을 해결하며 서로에게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자 노력한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며, 사귐의 행위를 통한 타인과의 교감으로 사회에 적응하고 자신의 결핍된 것들을 채워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닌 사람과 관
여론광장
이다원(한국음악‧16)
2018.03.25 22:49
-
‘바쁘지 않은 것’은 죄가 아니다
598
2018년 2월은 가장 열정 넘치는 달이었다. 정확히 30년이 되는 해에 한국은 다시 올림픽 개최지가 됐다. 그리고 필자는 이달 그 열정을 가장 뜨겁게 느낄 수 있는 평창에 있었다. 약 한 달 동안의 인턴 아닌 인턴 생활을 하는 동안 필자는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날들을 보냈다. 일과는 아침에 일어나 나갈 채비 후 조식을 먹고 셔틀버스를 타는 것으로 시작
여론광장
엄정모(소비・16)
2018.03.19 0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