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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터스텔라’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이 영화는 기존의 천체물리 관련 영화들에 비해 훨씬 정확한 과학적 지식과 시각적 이미지를 사용해 관객의 이해를 돕고 있으며, 이것이 높은 호응을 얻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이 영화의 제작 과정에서 과학적 검증과 영상화를 위해 책임 감독(executive producer)으로 참여한 미국 Caltech의 킵손(Kip Thorne) 교수는 최고의 천체물리학자이며 과학의 대중화에 힘써온 분이다. 이 영화에는 특히 상대론과 중력, 블랙홀, 웜홀이 소재로 사용되고 있어 관객들의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다. 중력은 우리가 늘 경험하고 있는 개념이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만유인력의 법칙은 뉴턴이1687년에 공식화를 발표한 중력이론이며, 이 법칙은 228년간 아무 문제없이 잘 사용되고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1915년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론과 모순되지 않는 중력이론을 만들어 소위 일반상대론이라 불리는 중력이론을 완성하였다. 그는 이 이론에 의해 수학적으로 아주 복잡하지만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함과 동시에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었다. 그중에서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굽어진다는 가설은 실제로 태양 주위에서 빛의 휘어짐이 관측됨으로써 사실(진실)로 밝혀지게 되었다. 이때 공간의 굽어짐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으며 시각화도 가능하다. 시간의 문제는 시간의 팽창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즉 중력이 클수록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예를 들면 어느 피아니스트가 중력이 아주 큰 별에서 빠르게 곡을 연주한다면 멀리 떨어진 중력이 약한 곳에서는 그 곡이 훨씬 더 천천히 연주되는 것으로 들린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중력이 매우 강한 경우에 적용되며 중력이 비교적 약할 때에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웜홀이란 공간의 지름길을 말한다. 그림처럼 벌레가 사과 표면을 기어서 이동하는 것보다 지름길을 통하면 훨씬 짧은 경로를 이동하게 된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는 두 지점을 잇는 것이 웜홀의 기능이다. 웜홀은 우주에서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로 존재해 과거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1988년 이후 킵손 교수가 웜홀을 안정화할 수 있는 방안, 즉 충분히 통로를 열어 놓을 수 있는 물질을 찾게 되자 웜홀은 과학자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블랙홀은 중력이 매우 강해서 공간이 심하게 굽어져 빛마저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천체를 말한다. 이 천체는 질량에 비해 그 크기가 엄청나게 작으며, 태양보다 3-4배 이상의 질량을 가진 별이 수명이 다한 후에 자연적으로 붕괴되어 생성된다. 블랙홀의 내부에는 모든 것들을 부수어버리는 공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특이점(singularity)이라 부르며 하나의 점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블랙홀 중 회전하는 블랙홀은 특이점의 구조가 고리의 형태로 되어 있어서, 영화에서는 그 고리를 통하여 다른 우주로 이동하는 상황을 구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혀 손상되지 않고 빠져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렇게 회전하는 블랙홀을 3차원으로 표현함으로써 과학적으로도 타당하고 시각적으로도 매우 아름답고 신비감 넘치는 영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과학적 지식은 ‘인터스텔라’의 스토리와 이미지를 훨씬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영화관 안에서 짧은 시간이지만 별과 별 사이의 여행이 주는 기쁨을 훨씬 더 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학술·책 | 김성원 교수(과학교육학과) | 2014-12-01 23:57

현대 중국의 대표적인 여류작가 장아이링(張愛玲, 1920-1995)은 죽기 1년 전인 1994년 6월 『대조기(對照記)―옛 앨범을 보다』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작가가 보관하고 있던 옛 사진을 골라 편집하고 거기에 설명을 덧붙인 자전적 성격의 사진첩이다.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 사진첩에서 창조력을 유지하며 강인함과 고집 그리고 긍지를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 초판본 『대조기』의 마지막 문장은 장아이링의 이러한 면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의 일생을 압축하여 표현해주고 있는 듯하다. “영원히 살 것 같은 길고도 긴 어린 시절은 상당히 유쾌하게 하루를 일 년처럼 보냈는데, 많은 사람들이 다 동감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후 굴곡 많은 성장기 역시 아득히 머나먼 길에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온통 황량함만이 가득하였으며, 단지 할아버지 할머니의 부부인연만이 색채가 선명하여 내게 큰 만족을 주었고, 그래서 여기에 비례가 맞지 않은 편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 후 시간은 속도를 더해 빨라지고 빨라져서 번현급관(繁弦急管)이 급관애현(急管哀弦)으로 바뀌었고 급경조년(急景凋年)이 벌써 멀찍이 내다보인다. 한 줄로 연이어진 몽타쥐는 아래로 이어지면서 점차 엷어지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유년기, 성장기, 중년과 말년 시기를 요약하듯 서술하면서 독자들에게 자기의 ‘자화상’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그 자화상을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 엷어지는 ‘몽타쥐’로 비유하였는데, ‘기울어져가는 조락의 말년[急景凋年]’에 이르면 ‘몽타쥐’의 끝자락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하다. 그런데 1994년 말 『대조기』의 재판본을 펴내면서 장아이링은 거기에 「발문」을 덧붙이고 새로 사진을 하나 더 실었다. 흥미로운 것은 새로 실은 이 마지막 사진이 북한의 김일성 사망 소식을 알리는 헤드라인뉴스의 신문을 들고 찍은 작가 자신의 사진이라는 점이다. 이 사진은 원래 타이완(臺灣)의 『중국시보(中國時報)』로부터 문학상을 받을 때 신문사에 보냈던 작가의 근영(近影)이었다. 작가는 ‘주석 김일성이 어제 갑자기 사망하다’라는 뉴스를 표제어로 인쇄한 중국어 신문을 말아 왼손에 들고 사진을 찍었는데, 의도적인 연출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사진 속의 작가는 흰색 망사 조끼를 입고 겉에는 검은색 바탕에 흰색 꽃무늬가 있는 양모 스웨터를 입은 모습이다. 스웨터는 목이 V자로 크게 패이고 목둘레와 소맷자락에 흰색테두리를 둘렀으며 그녀의 희끗희끗한 곱슬머리는 풍성하게 부풀어 있다. 그리고 그날 발행된 예의 중국어신문을 말아 왼손에 들고 오른쪽 어깨 위에 비스듬히 기대어놓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사진은 광고를 찍듯이 작가가 스스로 연출한 것이 분명한데, 검은색과 흰색이 배합된 옷차림, 죽음을 알리는 신문을 말아 들고 있는 모습 등을 고려할 때 스스로 저승사자로 분장한 것이 아닌가! 작가는 가까이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일까? 작가는 「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여러분과 함께 동일한 헤드라인 뉴스를 보니 ‘하늘가에서 이 시각을 공유하는’ 즉각감(卽刻感)이 든다. 신문을 손에 들고 있으니 마치 유괴범이 유괴 당한 가족에게 보내는 사진처럼 그날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다.” 작가는 억지스런 비유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이 지은 짧은 시를 한 수 인용했다. “사람은 늙으면 누구나/ 시간의 포로가 되어,/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시간은 나를 아직 잘 대하지만――/ 언제든지 인질을 죽일 수 있다./ 일소(一笑)할 뿐이다.” 장아이링은 이 사진을 통해 독자들과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동시에 김일성 사망이 ‘1994년 7월 8일’이라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그 사진을 찍은 날짜를 확정해주고 있다. 더욱이 갑자기 전해진 김일성 사망 소식에 시간의 포로인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깨달았을 때, 그녀 자신에게도 죽음이 성큼 다가와 있음을 직감하게 된 것이다. 인생의 화려함도 지나가버렸고 인생의 창량(蒼凉)함도 경험한 바 있는 그녀로서는 칠순이 넘은 이 시점에 욕망도 미련도 없이 어느새 다가온 죽음을 담담하게 마주한 것이다. 장아이링에게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범한, 그러면서도 언뜻 지나가버리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쌀쌀한 가을 저녁 해질 무렵, 바닥에 온통 생선 비린내와 회백색의 갈대 껍질과 찌꺼기로 가득한 시장 안으로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실력을 뽐내며 손잡이에서 손을 떼는 묘기를 부리며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그 순간,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말 못할 경이로움에 사로잡힌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는 어쩌면 그처럼 손을 놓을 때가 아닐까?”(「옷을 갈아입다」) 그런 생각이었기에 김일성의 죽음 역시 ‘일소(一笑)’에 부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사진은 작가가 독자들과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며 현재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고, 동시에 시간의 포로인 인간의 비극적 운명과 그에 대한 달관을 표현하고, 한편으로는 작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가 스스로가 저승사자로 분장한 것이라면,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작가는 왜 굳이 김일성의 죽음을 알리는 저승사자로 분장한 것일까? 1952년에 사회주의 중국의 대륙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홍콩을 거쳐 미국에 정착함―장아이링에게는 북한 체제를 이끌어온 김일성의 죽음이 예사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장편소설 『적지지련(赤地之戀)』을 창작한 바 있는 그녀로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냉전체제하의 극한적 이념대립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때, 그 당사자의 한 사람인 김일성의 죽음은 그녀에게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니었다. 뿌리는 중국 대륙이지만 그곳을 떠나왔고 타이완을 왕복해왔지만 거기에도 안착할 수 없었던 장아이링에게 미국 이민자의 실향민적 정서가 더해지면서 북한 체제를 이끌어온 김일성의 사망 소식은 이념대립에 대한 깊은 사색을 다시금 불러왔을 것이다. 그래서 이념추구의 허망함을 드러내고 극한적 이념대립의 종식을 기대하면서 스스로 저승사자로 분장하여 김일성의 죽음을 알리는 전갈을 들고 나타난 것은 아닐까. ‘일소(一笑)’는 표면적으로는 시간의 포로인 인간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달관의 태도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이념추구의 허망함을 일깨우고 이념대립을 극복하려는 작가의 내면적 기대를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장아이링은 자기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특징을 서술하면서 “그들은 비록 연약한 범인(凡人)에 지나지 않아 힘을 가진 영웅에 미치지 못하지만, 바로 이런 범인이 영웅보다 이 시대의 총량을 대표할 수 있다고 믿는다”(「나의 문장」)라고 말한 바 있다. 역사와 영웅의 서사를 거부하고 일상과 범인의 서사를 추구했던 그녀의 문학적 주제에 비춰볼 때 김일성의 죽음은 자신의 문학적 주제를 방증하는 구체적인 실례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김일성이 아무리 북한 체제 내에서 영웅처럼 떠받들어져왔다고 하더라도 시간의 포로로서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말았으니 그는 범인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장아이링의 이 마지막 ‘몽타쥐’ 사진은 인간의 비극적 운명과 작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 더 나아가 영웅서사의 거부와 이념대립의 극복에 대한 기대 등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은유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장아이링이 당시 타이완의 국민당정부나 중국 대륙의 공산당정부 모두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그녀의 일관된 탈정치적 입장과 선악의 이분법적 대립을 부정하는 그녀의 문학적 주제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가 1976년 자전적 작품 『소단원(小團圓)』을 집필하고 있을 때 더딘 진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은 참고할 만하다. “국가주의의 제재(制裁) 때문에 줄곧 쓸 수가 없어요.……제가 타이베이(臺北)에서 천뤄시(陳若曦)와 한 대담은 국민정부에 대한 나의 생각이 줄곧 유녀시절과 청년시절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이지, 결코 친공(親共)은 아닙니다. 근래에는 단일민족주의(monolithic nationalism)가 좀 느슨해지고 있다고 느껴져서, 예컨대 영화에서 영미 스파이가 애국하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마음에 품고 있던 한 가닥을 표현했던 것인데,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소단원·머리말』) 국민당정부를 비판하는 입장이 곧바로 친공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장편소설 『적지지련』(1954년)에서처럼 반공의 이미지를 그려낸다고 해서 곧바로 국민당정부를 승인하는 것도 아니다. 장아이링에게 글쓰기의 곤혹은 현실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국가주의와 같은 정치적 이념에서 유래한다. 정치적 이념에 대한 거부가 원초적 본능처럼 작가의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에 이념대립의 극복이나 그 초월에 대한 기대가 『적지지련』의 작품에서도 어둠속의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것이다. 중국 지원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소설 속 주인공 류취안(劉?)이 반공 포로로 분류되지만 결국 사회주의 중국 대륙 행을 결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반공 포로가 돌아가면 분명 비참한 보복을 당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동안 잘 배운 덕에,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통과하고 군중에게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한 사람의 힘은 한계가 있지만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장아이링이 기대하는 이념대립의 극복은 어떻게 시적 표현으로 형상화될 수 있을까? 그녀의 「낙엽의 사랑」이라는 시를 보자. “큼직한 노란 낙엽이 떨어지네./ 천천히, 바람을 스치고,/ 맑은 푸른 하늘을 스치고,/ 날카로운 햇살을 스치고,/ 회색빛 양옥집의 속된 꿈을 스치네./ 떨어지다 중도에야,/ 알아차렸으니 낙엽은,/ 자기 그림자에게 입맞춤 하려는 것을./ 땅 위의 그림자는,/ 맞으러 튀고 또 튀어 오르고,/ 너울거리며 춤을 추듯이./ 낙엽은 최대한 속도를 늦추어,/ 중년의 초연함을 가장하는데,/ 하지만, 바닥에 닿는 순간,/ 금빛으로 물든 손바닥이,/ 조심스레 검은 그림자를 감싸네,/ 마치 귀뚜라미를 잡는 듯이―/‘아, 여기에 있었구나!’/ 가을 햇살 속/ 시멘트 바닥 위에,/ 조용히 함께 잠드네,/ 낙엽과 그의 사랑이.” 장아이링은 이 시를 짓고 나서 무척 만족해했는데, 낙엽이 자기 그림자와 완전히 조우하여 자기동일성을 완성하는 순간을 포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장아이링 문학에서 드물게 보이는, 현실의 대립이 화해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장아이링은 “더럽고, 복잡하고 말로는 납득할 수 없는 현실”(「중국의 낮과 밤」) 속에서 잠시나마 대립의 극복과 화해가 달성되는 순간을 ‘낙엽의 사랑’으로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

학술·책 | 홍석표 교수(중어중문학과) | 2014-11-17 14:32

베이징대학 교수 저우쭤런(周作人)은 1925년 당시 존재가 희미했던 일제치하 ‘조선’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 중국문화 연구에 일본학 못지않게 조선학도 필요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우리는 일본학이 우리나라 문화 연구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동시에 조선이 기여할 수 있는 것도 일본만 못지않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일본적인 것도 아니요 또 전적으로 중국적인 것도 아니다. 나는 여기서 덧붙여 조선예술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싶다.”(「조선 전설」) 한중 교류가 그 어느 때보다 광범하게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지난 과거를 돌이키면서 근대 시기 한중(韓中) 교류와 상호인식의 역사적 경험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그 역사적 경험의 일단을 루쉰(魯迅)과 그 제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루쉰은 상하이에 거주하면서 1929년 5월 베이징을 방문하여 20일간 체류하게 되는데, 루쉰의 당시 일기를 보면 그는 베이징대학 교수들을 위시하여 그의 제자들과 자주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루쉰이 아끼던 제자인 웨이젠공(魏建功)과 타이징농(臺靜農)도 루쉰을 방문하여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밤늦도록 ‘통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에 웨이젠공과 타이징농이 모두 한국과 일정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웨이젠공(1901-1980)은 1927년 4월부터 1928년 8월까지 경성제국대학 중국어 담당 교수로 초빙되어 한국에 체류하게 되는데, 당시 한국에서의 체험과 사색을 담은 에세이 성격의 ‘교한쇄담(僑韓?談)’이라는 글을 연재한 바 있다. 이 글은 루쉰이 관여하고 있던 잡지 『어사(語絲)』에 실렸는데, 한중의 역사적 문화적 관계, 일제치하 한국의 상황, 한국 독립의 필요성 등을 상당히 균형 잡힌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는 「중한 사이의 애증(愛憎)」이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목전의 사실(事實)로서 중한 인민이 감정적으로 미워하는 것과 이상(理想)으로서 중한 인민이 정신적으로 우호적인 것은 ‘공영공존’의 ‘동아주의(東亞主義)’의 표면과 이면이다”라고 말했다. 한중 인민들 사이에 미워하는 정서가 표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저변에 흐르는 우호적인 정신적 유대감이 더 본질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 그는 당시 서울을 방문한 베이징대학 교수들과 함께 조선의 무당춤을 보고 이왕직(李王職)의 아악 연주를 들었는데, 「청운동 무당춤(淸雲巫舞)」과 「아악(雅樂)」이라는 글에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한국 무당춤을 세밀한 복식(服飾) 그림을 곁들여 설명하고, 조선의 악기 종류를 분류, 중국과 비교 기술하는 등 한국의 민속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학술적인 가치가 뚜렷한 이 글에서 그는 ‘고려 음악의 특색’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특색은 바로 그들 민족성의 표징이며 대체로 비장하고 침중한 쪽에 속하는 것이었다.”라고 평가했다. 더욱이 「두 명의 주자(朱子)」라는 글은 웨이젠공의 ‘조선’ 인식을 여실히 보여주는바, 루쉰과 웨이젠공, 타이징농 사이의 스스럼없는 대화에서 오고갔을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 웨이젠공은 이 글에서 ‘조선’의 사상과 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성리학의 창시자 주희(朱熹)와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이러한 두 가지 중요한 관계 하에 조선사상사에서의 대반동으로서 그들은 적극적으로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을 추구하였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필요와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명의 주자(朱子)가 조선에 끼친 영향을 잘 안다면 조선에서 20여 년 전 자주독립한 사실이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자연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조선의 유래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으니, 어찌 우연이겠는가! 근래 듣자하니 중국 화교들을 모욕하는 조선인이 많고, 또한 그들은 중국인을 멸시하는 ‘짱코우(Chiangkou)’라는 일본말로 조롱하고, 심지어는 많은 조선인이 길거리에서 중국인을 만나면 때리기도 한다고 한다. 나는 감정에 의거하여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동시에 나는 우리나라 국내에 망명하여 정착한 많은 조선인들이 마찬가지로 중국인, 예컨대 경찰과 같은 무리들로부터 억압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미쳤다.” 이 글은 주희와 주원장의 조선사상사에 끼친 영향, 조선이 독립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 조선의 중국인 화교에 대한 공격과 중국내 경찰의 조선인 억압, 그리고 문맥 속에 드러나는 한중 상호이해의 필요성에 대한 사색 등을 담고 있는데, 이러한 웨이젠공의 균형 잡힌 시각과 태도는 매우 소중한 가치를 갖는다. 루쉰은 1929년 5월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서울로부터 귀국한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웨이젠공과의 ‘통쾌한’ 대화에서 한국의 실상을 좀더 이해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어사』의 ‘교한쇄담’에 표현된 한국에 대한 웨이젠공의 시각과 태도에 공감하는바 컸을 것이다.웨이젠공과 함께 루쉰을 방문하여 ‘통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타이징농(1903-1990)은 루쉰의 평가처럼 ‘향촌의 삶과 죽음, 흙의 숨결을 묘사한’ 향토소설작가로서 단편소설집 『땅의 아들(地之子)』(1928년)로 잘 알려져 있다. 타이징농의 작품 중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땅의 아들』에 실린 「나의 이웃」이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작중 화자인 ‘나’의 옆방에 세든 ‘조선인’의 기이한 생활모습을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나’는 아침에 배달된 신문에서 일본 관련 기사를 읽다가 조선인이 일본의 황궁을 폭파하려다 경찰에 체포되어 어느 날 처형되었다라는 내용을 보고 작년에 옆방에 살던 한 젊은이를 떠올리며 그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해가 들지 않는 음침한 분위기의 옆방에 살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은 나와의 대화에서 조선인임이 밝혀지고, 그의 기이한 생활은 조선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것으로 묘사된다. 성냥불을 켜는 소리만 들린다든지, 방안에서 따박따박 구두소리를 내며 왔다갔다한다든지, 편지를 받으면 몇 분 후 곧장 태워버린다든지 하는 기이한 행동을 보이던 옆방의 조선인은 결국 ‘야수들’(경찰을 암시)에게 체포되어 잡혀간다. 멀리서 들리는 ‘당신네 조선 사람들......’이라는, 나의 이국 이웃을 모욕하는 그 야수들의 목소리에 나는 분노하며 그들에게 증오를 보낸다. 1년이 지난 뒤 우연히 신문에서 본 기사의 주인공이 바로 옆방에 살다가 잡혀간 그 조선인이었다는 것이다. “이건 그대가 아닌가? 그대의 마음 깊이 쌓인 복수를 위해 이런 위대한 희생을 했던 것이리라. 나의 불행한 친구여!”라는 ‘나’의 독백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은 1923년 9월 일본의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인의 조선인학살사건이 발생하자 일왕 히로히토(裕仁) 암살을 실행하려다가 체포되어 1926년 3월 사형선고를 받은 박열(朴烈)사건에서 제재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외롭고 고독한 이국땅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칩거에 가까운 비밀스러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의 형상을 빌려 한국인들에게 독립이 얼마나 간절한가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나의 이웃인 ‘조선인’을 핍박한 ‘나쁜 놈의 잔혹한 수단’을 폭로하고 그를 잡아간 ‘야수들’을 저주하면서 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아끼지 않는 데서 잘 드러난다. 타이징농은 작품 속에서 ‘조선인’은 일본 지진(관동지진) 이후 ‘작년’에 중국에 들어온 것이라 하였는데, 관동대지진이 1923년 9월에 일어났으니 이 작품의 주요 시간적 배경은 1924년일 것이고 창작 시점은 박열(朴烈)사건의 사형선고가 내려진 1926년 3월 이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타이징농과 웨이젠공이 막역한 친구사이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타이징농과 웨이젠공의 개인적 친분관계를 고려할 때 1927년 봄부터 서울에 체류하던 웨이젠공이 베이징에 돌아오면 타이징농을 만났을 것이고 그들의 대화에서 ‘조선’ 이야기는 매우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의 ‘조선’ 이야기는 타이징농에게 한국에 대한 심화된 이해를 가져와 「나의 이웃」 의 내용에 무의식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역으로 타이징농의 「나의 이웃」에 묘사된 한국인에 대한 연민과 한국 독립에 대한 기대는 웨이젠공에게 문학적 감화를 일으켜 한국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과 태도를 갖도록 이끌었을 것이다.일제치하 ‘조선’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루쉰은 이들 제자들과 교류하면서 ‘조선’의 현실을 좀더 적극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루쉰은 웨이젠공과의 대화를 통해 한국의 정황을 실감나게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며, 한국 독립의 당위성과 한중 상호이해의 필요성을 드러내고 있는 ‘교한쇄담’을 통해 한국 이해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타이징농의 『땅의 아들』을 높이 평가한 바 있는 루쉰은 그 첫 작품인 「나의 이웃」을 통해 한국 독립의 절박성에도 공감했을 것이다. 물론 루쉰이 제자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한국 체험과 한국 인식으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았지만, 그 제자들이 한국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묘사한 데에는 루쉰으로부터 받은 정신적 영향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학술·책 | 홍석표 교수(중어중문학과) | 2014-11-10 19:44

지난해 7월 필자는 기대에 부풀어 중국 쑤저우(蘇州)를 방문한 바 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류수인(柳樹人)의 따님 류앵(柳鶯) 여사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정원이 잘 꾸며진 단아한 아파트를 찾아 들어서니 벌써 류앵 여사 내외분이 밖으로 나와 반겨주었다. 류앵 여사는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적이며 활력이 넘치는 분이었다. 마치 부친 류수인의 풍모를 보는 듯하였다. 대화는 중국어로 진행되었지만 유쾌하고 스스럼없는 대화였다. 그녀는 부친의 조국을 자신의 또 다른 조국으로 여기며 자랑스럽게 부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부친의 자전적 회고록 『삼십년 방랑기』의 친필원고(중국어원본)와 부친 관련 사진 등을 보관하고 있었으며, 모친 잉치루안(應起鸞)이 남편 류수인을 회고한 「옛일을 회상하며―한국 혁명선배 류수인의 중국에서의 항일생활」이라는 글과, 자신이 쓴 「늦게 찾아온 영예―부친 류수인 선생을 추억하며」라는 글을 필자에게 전해주었다. 주지하듯이 류수인(1905-1980)은 1927년 한국 최초로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의 단편소설 「광인일기」를 국내에 번역 소개한 것으로 유명하다. 본명이 류기석(柳基石)이며 류서(柳絮)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일제시기 중국 역내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당시 아나키즘문예이론가로서 중국 비평계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05년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서 태어나 8세 때 가족을 따라 중국의 북간도로 이주, 1924년 6월 난징(南京)의 화중공학(華中公學)을 졸업하고 그해 9월 베이징(北京)의 차오양대학(朝陽大學)에 입학하였다. 그 후 그는 한국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아나키즘운동의 이론가요 실천가로 활동하게 되는데,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기도 하였고 중일전쟁 시기에는 한국인으로 구성된 전지공작대(戰地工作隊)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그 공로로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류수인은 1925년 중국 상하이에서 5·30사건이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반제(反帝)운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베이징 조선유학생회 대표로서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열린 민중대회에 참가한 바 있다. 그해 7월 10일자 『조선일보』에는 「베이징 국민대회에서 대중을 흥분시킨 동포―조양대학에 재학중인 류군 벽두에 등단하여 일장 연설」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의 일부를 보자. “그 중에서 외국 사람으로 제일 먼저 등단한 사람은 류기석이라는 동포였었다. 류군은 현재 조양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 이날 제일 먼저 등단하여서 침통한 사기로 장시간의 연설을 시험하였으며 연설이 끝나매 단하에 모여 섰던 십만 군중은 비상히 흥분되어 중화민족 만세와 ‘○○○○타도 ○○제국주의’를 높이 불러 많은 중국인에게 흥분을 주었고, 그 다음으로는 독일인, 일본인, 인도인, 대만인, 터키인 등의 대표가 차례로 일장연설을 시험하였더라.” 류수인의 연설 내용은 베이징의 각종 대형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였는데, 이 민중대회 연설은 일제(제국주의)에 항거하는 류수인의 실천가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필자가 전해 받은 류수인 가족들의 회고 또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류수인의 또 다른 일면과 사실을 보여주기에 무척 흥미롭다. 부인 잉치루안은 「옛일을 회상하며」(2006년)라는 글에서 남편 류수인과의 첫 만남, 나라 잃은 이국 청년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부모의 반대와 설득에 성공한 결혼, 남편의 한국독립운동 활동과 그로 인해 아이 넷을 홀로 키우던 어려운 생활,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짧은 재회의 아쉬움 등을 감동적으로 서술해놓았다. 그녀는 1928년 가을 어느 날 난창(南昌)에서 류수인을 처음 만났고, 그 첫인상을 “그의 눈빛은 번쩍번쩍 빛나고 용맹한 기개가 넘쳤으며, 보자마자 깊은 인상을 남겼다”라고 표현했다. 장시성(江西省) 여자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녀는 그때 마침 학생시위를 주도하다 공청단(共靑團)에 참가하고 있다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체포 위협을 받고 난창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후 융슈(永修)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4년간의 연애 끝에 마침내 부친의 승낙을 얻어 류수인과 결혼했다고 한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류수인은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가담하여 1932년에는 톈진(天津)의 일본군 병영에 폭탄을 투척하기도 하였고 1937년에는 일본의 전면적인 중국 침공이 시작되자 일본의 주중국 대사 다니 마사유키(谷正之)의 암살계획에도 참여하였다. 1938년 이후에는 쑤베이(蘇北) 지역으로 옮겨가 중국 유격대에 합류하기도 하였는데, 이 무렵 홀로 아이 넷을 키우던 부인 잉치루안이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보낸 시는 감동적이다. 7언 배율로 씌어진 이 시는 류수인의 필명 류서(柳絮)를 ‘버드나무’(柳)와 ‘솜털’(絮)로 빗대어 표현하는 등 ‘정경교융(情景交融)’의 풍부한 은유로 남편을 그리는 마음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滿懷懮郁訴君知 가슴 가득 우울함 그대에게 알리노니,鴻雁無書何事羁 큰기러기도 편지 전하지 않고 어인 일로 타향에 오래 머무르시는지.兩載離情縈夢轂 2년 간 이별에 그리움은 꿈에서 감돌고,一輪明月系相思 휘영청 밝은 달에게 그리운 마음 전할 뿐.紅梅吐蕊爭春早 붉은 매화는 꽃술을 틔우며 초봄을 다투고,綠柳垂絲着絮遲 푸른 버들 실가지 드리운 채 솜털은 천천히 피어나는데,兒女成行方待哺 아이들은 먹이를 달라고 앙앙 울어대니,千鈞重任付將誰 이 막중한 책임 누구에게 지우는가?梅影窺窗春夜寒 매화 그림자 창문에 비추니 봄밤은 더욱 차갑고,傷心獨自倚欄杆 슬픈 마음에 나 홀로 난간에 기대네.今宵對月情彌篤 오늘 밤 달을 마주하니 그리움이 깊어져,此夕思君心更酸 이 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더욱 시리어라.莫戀江南春色好 강남의 아름다운 경치 탐하지 마시고,應思塞北昔年歡 북방에서의 즐거운 옛 시절을 그리워하소서.雲飛千里君忘返 구름 천리 밖 떠나신 그대는 돌아올 것을 잊었는지,幾點相思淚未乾 그리워하며 흘린 눈물 아직도 마르지 않았네. 류수인은 이 시를 받고서 전선을 뚫고 “위험을 무릅쓰고 천리나 되는 머나먼 길을 지나 부인과 아이들을 만나러 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틀 만에 또다시 부인과 아이들을 두고 떠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부인 잉치루안은 「멀리서 돌아온 그대 떠나니, 다시 이별시를 짓다」라는 제목의 시를 지어 이별의 아쉬움과 사랑의 다짐을 사무치게 표현하였다.兩載睽違夢寐思 2년 이별의 그리움은 꿈속에서도 맴돌고,相逢數日又相離 며칠간 만남에 또다시 이별을 해야 하네.驪歌再唱心如醉 이별노래 다시 부르니 마음이 취한 듯,馬齒徒增鬂有絲 어느 듯 나이만 먹어 흰 머리 늘었어라.万縷相思何處訴 샘솟는 그리운 마음 어디에 호소할까?幾多別緒暗中悲 얼마나 남몰래 이별을 슬퍼했는가!陽春似慾留君住 따스한 봄날이 그대를 만류하는 듯하고,柳影花光樓滴遲 버드나무 그늘 꽃빛 화사한 누각에서 눈물 천천히 흐르네.感君來去太匆匆 그대는 왔다가 총총히 떠나지만,脈脈情懷彼此同 서로 사랑하는 마음 그대와 나 한결 같네.共話淒涼流浪後 함께 했던 이야기는 그대 떠난 후 처량해질 것이고,空留寂寞夢魂中 꿈속에서도 외로움만 덩그러니 남아 있겠지.參差綠柳爭春色 들쭉날쭉 푸른 버드나무는 봄 경치를 다투고,隱約紅桃漾晚風 은은한 붉은 복숭아는 저녁바람에 넘실거리네.最是無情今夜月 가장 무정한 것은 오늘 밤 저 달이어라,照人離別倍朦朧 이별할 사람을 비추니 몽롱한 분위기 더욱 짙어지네. 류수인의 따님 류앵 여사는 「늦게 찾아온 영예」(2010년)라는 글에서 “아버지의 전반(前半) 생애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투성이의 싸움 속에서 보냈다”라고 하며 어린 시절 온화하고 다정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평시에 집에서는 말이 많지 않으셨지만, 내가 아버지더러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면 아버지는 언제나 내 요구를 다 들어주셨다. 끝없이 이어지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가장 많이 해주신 이야기는 항일투쟁 이야기였다. 이들은 정말이지 감격적인 이야기였다. 회고해보면, 아버지께서는 모두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들려주셨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이 당신이 직접 겪으신 것이었다. 그러니 그토록 생동적이고 그토록 황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심금을 울리던 이야기가 지금도 나의 기억에 남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아른거린다.” 류앵 여사는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도 잊지 않았다. 1932년 12월 부친 류수인이 주도하여 톈진(天津)의 일본 영사관 폭파사건을 일으켰을 때 베이징에 있던 폭탄을 톈진으로 옮기는 임무를 모친 잉치루안이 맡았다는 것이다. “당시 어머니는 겨우 스물다섯의 나이였다. 유행복 차림에 가죽외투를 입은 모던여성으로 분장하고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신식 가죽상자(안에 두 개의 폭탄이 담겨 있었음)를 손에 들고 이등칸에서 내려 태연자약하게 플랫폼을 빠져나오는데,……아버지와 어머니가 연합하여 ‘연출’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우리 자녀들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남아 있다.” 이처럼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애틋한 사랑으로 충만한 부인과 아버지에 대한 긍지로 가득한 딸이 있었기에 류수인은 고난에 찬 항일독립운동에 흔들림 없이 매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광복 이후 아나키즘사상으로 인해 그는 남한과 북한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는데, 한국 현대사의 어떤 비극을 보는 듯하다. 류수인은 1949년 5월, 조국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하였으나 2개월을 머물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1952년 11월부터 쑤저우대학(蘇州大學) 역사학과 교수로 취임하면서 쑤저우에 정착하였고, 1980년 11월 사망하기까지 대학 교수로서 동남아역사와 한중관계사 연구에 전념했다. 류수인의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활동과 관련하여 우리가 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한중의 진보적인 지식인의 국제적 연대에 관한 것이다. 류수인은 아나키즘문예이론가로 활동하던 1928년 당시 상하이에서 출판사 편집을 담당하고 있던 스유헝(時有恒)과 함께 루쉰을 방문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문예이론과 사상 면에서 루쉰과 공감하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문단에서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던 ‘혁명문학논쟁’에서 루쉰과 류수인은 동일하게 문예의 ‘선전 도구화’ 또는 ‘무기의 예술’을 주장하던 ‘혁명문학파’를 비판하면서 문예의 자율성을 지키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류수인이 루쉰을 방문한 것은 단순히 루쉰 작품의 번역이나 중국의 대표적인 문인을 만나려는 열망 때문만이 아니라 문예이론상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한국의 독립운동과 아나키즘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류수인에게는 일종의 사상적 연대를 모색하려는 시도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학술·책 | 홍석표 교수(중어중문학과) | 2014-11-03 13:40

ㄱ씨는 방학 때 다이어트를 통해 8kg을 감량해 완벽한 모습으로 개강을 맞이하려 했다. 하지만 방학 동안 3번의 식도락 여행을 다녀오면서 3kg밖에 감량하지 못했다. ㄱ씨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좌절감으로 인해 폭식증이 생겼다. "8kg을 감량했으면 제가 원하던 외모가 됐을 텐데 3kg밖에 감량하지 못해서 자신감이 떨어져요. 주변 사람들은 살 빠졌다고 칭찬하는데 저는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가을학기를 시작하는 학생들로 여름 내내 조용하던 이화의 교정이 떠들썩하다. 학기 초가 되면 완벽하게 개강을 준비하려는 심리로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이화인들도 있다. 「지친 완벽주의자를 위하여」의 저자 리처드 윈터(Richard Winter)는 완벽주의를 삶의 일부 또는 모든 영역에서 결백하고 흠이 없기를 갈망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본지는 개강을 맞아 개인에게 패배감을 주는 완벽주의의 원인과 증상, 그에 따른 부작용과 해결 방안을 책을 통해 살펴봤다. △100% 아니면 0%, 극단적 완벽주의자윈터에 따르면 완벽주의는 ▲기질과 유전 같은 선천적 요인과 ▲자기방어 심리의 발달 ▲문화와 대중매체의 압력 같은 후천적 요인에 의해 유발된다. 윈터는 부모가 아이의 완벽주의 발달에 영향을 끼치기 훨씬 이전인 초기 단계에 아이가 청결, 단정, 정리정돈 등에 특히 신경을 쓰는 경우에 아이의 완벽주의 기질은 타고 난 것이라고 말한다. 부모가 완벽주의자면 아이도 완벽주의 기질을 보이는 것이다. 학대를 받았거나 가정에 불화가 있었던 경우 등 불안을 많이 겪은 사람들은 그때보다 더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완벽주의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완벽한 외모나 소유물을 과시하는 텔레비전 방송 또한 완벽주의적 사회 분위기를 조장한다. 특히 이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일을 실제적인 자아에 요구하면서 압박을 느낀다. 데이비드 스툽(David Stoop)은 자신의 저서인 「완벽주의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완벽주의자들은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어떤 것이든 완벽하거나 가치 없거나 둘 중 하나라고 여긴다. 소위 말해 ‘전부 아니면 전무’의 사고를 한다. 또 완벽주의자들은 실패가 두려워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으려고 한다. 스툽은 이런 현상을 ‘장애 효과’라고 말했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완벽주의자들은 실패는 극대화하고 성공은 극소화하는 ‘극대화와 극소화’의 방식에 빠진다. ㄴ씨는 방학 동안 MOS 자격증 4과목 중 3과목에 합격했다. 친구가 ㄴ씨에게 3과목이나 합격했다고 칭찬하면 ‘원래 4과목 모두 합격해야 하는데 아직 3과목밖에 합격하지 못했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ㄴ씨의 이런 태도에서 완벽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을 볼 수 있다.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또 다른 증상은 완벽주의자들이 비현실적인 목표를 세운다는 점이다. 이들은 항상 비현실적인 목표에 도달하려 손을 뻗고 실패할 경우 자신을 실패자라고 여기며 낙담한다. 예를 들어 학기 중에 아르바이트, 과외, 동아리, 대외 활동을 병행하면서 학교 성적도 잘 받으려고 한다면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완벽주의자는 이러한 목표를 세워놓고 이를 달성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한다. 스툽에 따르면 비현실적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함으로써 완벽주의자들의 자존감은 점점 낮아진다. 계속되는 실패감으로 완벽주의자들은 이분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고 다시 비현실적인 목표를 세우지만 다시 실패하고 만다. 이러한 자기파괴적인 악순환은 이들의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더욱 강화시킨다. 완벽주의자들은 실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항상 실패할 것이라는 부정적 생각을 한다.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으면 실제로 실수할 가능성은 더 커진다.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은 신체에도 영향을 미쳐 질병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때 완벽주의자들은 신체적 질병에 관해서도 완벽주의적 성향을 보이는데, 병이 없거나 미미함에도 병을 과장하거나 반대로 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기도 한다.

학술·책 | 공나은 기자 | 2014-09-01 1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