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중 인상 깊게 읽었던 책 한 편에 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한정현 작가의 장편소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나를’)이다. ‘정상적’인 ‘남성’ 위주의 역사 속에서 여성, 성소수자, 혹은 둘 모두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존재는 끊임없이 배제되어 왔다. 이렇게 편향적으로 쓰인 역사를 경계하는 소설 ‘나를’은 긴장감 있는 추리물의 형식을 빌려 배제된 이들이 겪어야 했던 억압과 대상화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나를’의 구체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성형외과 의사인 ‘연정’과 문화 연구자 ‘설영’에게 낯선 단어들이
책/해가 지는 곳으로(2017)태어났으니 그저 살아갈 뿐인 나는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같은 존재론적 질문 앞에서 말문이 턱 막히곤 한다. 핑계는 고리타분하다. 경쟁과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점철된 대한민국에 사는 탓에 삶, 탄생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찰해 볼 시간이 없었다고. 마치 “일을 하지 않으면 금방 가난해”지므로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을 포기해야 했”던 ‘류’처럼 말이다. 찰나뿐인 철학적 사유는 명확하게 매듭지어지지 못하고 모호하게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내가 조심스레 말하건대, 인간이 저마다의 불행을 끌어안고서
몇 주 전 다른 대학에서 진행한 교양교육 포럼에 참석했다. 교양교과의 방향, 의사소통 교육, 소프트웨어교육 등 포럼의 중요 주제를 듣던 중 공통적으로 등장한 화제가 있었다. 장안의 화제가 된 CHATGPT가 그 주인공이었다. 특정 키워드를 제공하면 AI가 참고자료를 추출, 검토하여 원하는 분량의 글을 쓰기도 하고 음악을 만들기도 했으며 프로그램 코드를 간결히 짜기도 했다. 관련 자료를 소개한 연사는 직접 CHATGPT를 사용한 결과를 보여 주었다. 특정 주제로 글쓰기를 지시하자 순식간에 그럴듯한 글이 나왔다. 허술한 부분이 많았어도
점점 따뜻함이 품 안으로 스며드는 계절이다. 10월의 끝자락에 디뮤지엄의 ‘어쨌든 사랑 : Romantic Days’ 전시를 친구와 같이 보러 갔다. 순정만화를 모티브로 가져온 작품들이 많았는데, 순정만화를 보고 자란 세대가 아니었기도 했고 에로스적인 사랑은 그다지 감흥이 없어서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시험 기간이 이제 막 끝나서 지친 상태임에도 얼굴을 보자고 달려온 친구와 함께한다는 사실이 내게 더 가까운 따뜻함이었다.내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해주고, 내가 아플 때 걱정해주고, 종종 잘 지내는지 연락하는 따뜻한 챙김이 나에겐
80일. 터무니없이 짧아 보이는 시간이지만 거의 한 학기에 다다르는 시간이다. 어느새 영국 땅을 밟은 지 80일이 됐다.지낼 수 있는 기간의 절반이 넘어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제는 귀국 날까지 남은 시간보다 이곳에서 보낸 날이 더 길어졌다. 크리스마스를 주축으로 긴 방학을 가지는 유럽은 12월 초가 지나면 학교에 간다는 느낌도 희미해진다. 그렇게 계산해보니 내게 남은 시간은 2주 남짓. 내 인생의 거창한 전환점이 되리라 예상했던 교환학생은 별것도 없이 막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교환을 가기 전, 이미 갔다 온 수많은 사람에게 조
드라마/구미호뎐(2020)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존재는 언제나 호기심을 자극한다. 가령, 심해 깊은 곳이나, 광활한 우주 너머에는 무엇이 존재할지에 관한 생각들은 항상 매력적인 이야기 소재가 돼왔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구전되어오는 괴담도 그러하다. 괴담에 등장하는 요괴, 귀신, 괴물 등은 일상에서 비켜나 비일상의 영역에 위치하는 신기하고 기이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언뜻 보면 이질적으로 느껴지지만, 우리의 상상력과 가치관이 반영된 존재들이기도 하다. 드라마 ‘구미호뎐’은 한국의 설화적 세계관 속 비인간적 존재들을 그들만의 방
이번 학기부터 학부생을 대상으로 여성학 수업 가운데 를 가르치고 있다. 노동운동에 대한 대학사회의 관심이 1980~90년대와는 상당히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취업을 준비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장기화되고 있어 학생들의 처지는 상당히 힘겨운 상황이다. 취업을 할 수 있는가, 혹은 언제 할 수 있는가, 과연 자신이 원하는 곳에 취업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이슈로 부상한 지도 이미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여성노동 이슈에 관심을 갖고 문제의식을 심화할 수 있도록 무엇을 질문하고 무엇을 논의
본교 수학과를 1981년 졸업하고 동대학원 전산학 석사, 미 매사추세츠공대 전자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큐어소프트 부사장, 파수닷컴 부사장직을 거쳐 2019년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 3대 이사장으로 취임해 3년간 활동했다. 2019년부터 세계여성이사협회(WCD Korea) 비상임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정부의 IT국제표준화전문가(2001~2005년)로 선정됐고 ISLA국제보안전문가상(2015년), 여성정보인대상(2019년) 등을 수상했다.여러분은 혹시 ‘공대 아름이’라고 들어보셨나요? 2008년 한 통신사가 공과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2015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7년 9월부터 본교 철학과에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독일에서 출판된 『Erfahrung und Atmung bei Heidegger(하이데거 철학에서 경험 개념과 숨 개념)』, 역서로는 한병철의 『선불교의 철학』, 하이데거의 『예술 작품의 샘』, 『철학의 근본 물음』, 칼 야스퍼스의 『철학적 생각을 배우는 작은 수업』이 있다. 현재 한국 하이데거 학회 및 Heidegge
영화/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후회의 순간들이 쌓여 삶을 이룬다. 삶은 매 순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를 두고 “이 순간 이랬더라면”이라고 반추하며 나아가지만 돌이킬 수 없다. 수업에 지각했을 때 일찍 잤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사소한 것부터 어릴 적 꿈을 되돌아보며 포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상상하는 것까지, 크고 작은 후회와 이루어지지 않은 여러 가능성으로 삶이 구성된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 에블린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늘 좌절과 실패의 경험이 축적된 인물로 묘사된다. 이토록 아무
2022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이동권 시위가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시민들이 시위를 통해 직접적인 손해를 입으며 ‘멈춤’에 대한 새로운 공론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전장연은 열차 출입구를 막는 방식으로 지하철 운행을 지연시키며, 원하는 대로 이동하기조차 어려운 장애인 이동권의 현실을 파격적으로 알렸다. 전장연의 행동에 공감한다고 말하는 시민이 있는 반면 전장연 이동권 시위를 두고 일각에선 부정적인 반응을 쏟아냈다. 접근성 낮은 교통시설물과 예산 부족을 문제 삼으며 이어 나간 이 시위가 최근 다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
드라마/작은 아씨들(2022)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하는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이 22년 10월 9일 12부작으로 끝을 맺었다.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 내던져진 자매들은 여전히 우애가 좋지만, 소설 속보다 현실적이고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과 영화에서 여러 번 합을 맞춘 정서경 작가의 두번째 드라마로, 미술감독 류성희까지 합류해 세간에서는 ‘박찬욱 없는 박찬욱 팀’이라고도 불리운다. 현 사회의 문제점을 냉철하고도 아름답게, 그러나 어딘가 찜찜하게 묘사하는 박찬욱 영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드라마라고 할
침잠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관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매 새벽, 잠에 들지 못하거나, 잠을 자지 말아야 할 때마다 멸망하고 있는 한 세계의 낭떠러지에 서 있는 방관자가 된다. 나를 지탱하고 있는 이 가느다란 한 폭도 언젠가는 끊어질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부서지고 있는 것들을 다만 목도하고 무력해 한다. 그 연쇄를 끊어낼 수 있었던 적이 없다.여느 밤과 새벽이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늘 그렇듯, 가로선들과 어지러운 스캐치들을 바라보며 이것들을 끼워맞춰보려 한다. 나의 의지에 따라 나타나는 방향들과 음형들. 나타난 것들과
삶에 급격한 균열이 생길 때 우리는 충격과 당황으로 우왕좌왕한다. 그리고 기존의 체계로 더 이상 방어할 수 없는 수준으로 균열이 점점 더 깊어지고 확산될 때 공포와 불안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을 결정적으로 실감한 계기는 고작 3개월 만에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은 코로나 팬데믹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가 우리 삶에 전방위적으로 미친 영향력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가르쳐주었다. 사회적으로 기존 질서의 축이 흔들릴 때, 개인적으로 질적인 도약이 나타나는 발달 전환기에, 혹은 살아가면서
영국 마트에서는 어디서든 비건 음식을 찾아볼 수 있다. ‘새우 없는 새우튀김’ 같은 대체육부터 팔라펠을 비롯한 식물성 음식까지. 올해 초, 프랑스에서 교환학생을 했던 한 친구는 내게 유럽이 채식 지향의 삶을 위해서 너무나도 좋은 공간이라 말했다. 영국 또한 마찬가지다. 이 나라는 학교 식당에서마저 채식 메뉴를 제공할 정도로 다양한 삶의 방식에 민감하다. 하지만 이들은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다.잠깐,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다고? 재활용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을 먼저 언급하자면 이들은 음식물 쓰레기를 따로
드라마/나기의 휴식(2019)사회는 자꾸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쉬지 말고 달리라고 다그친다. 게임 속에서 퀘스트를 클리어하듯 사회에서 요구하는 각 단계를 착실히 완료해왔지만, 성인이 된 우리는 여전히 ‘나 자신’을 잘 모른다. 몸과 정신을 혹사해 얻어낸 결과물을 보면 보상처럼 만족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약간의 허탈함과 불안함 역시 찾아온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 걸까?이 물음은 나기라는 여성에게도 주어진다. 나기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 의해 통제된
한국 내 퀴어 행사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는 서울퀴어문화축제(퀴어축제). 365일 동안 단 하루, 15만 명의 사람들은 대한민국 곳곳에서 갑자기 나타나 반나절의 자유와 혐오 세력의 맹공격을 맛본다. 그리고 또다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자신을 숨기고 어딘가로 사라진다. “이 많은 사람이 다 어디로 가는거야?”통계적으로 인류의 10%는 성소수자라는 글을 읽은 적 있었다. 그렇다면 내 친구 중 몇 명이 자신을 퀴어로 정체화할 수 있는 것일까. 지하철에서 마주친 수많은 사람 중, 자신의 성적 지향성이 사회 규범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사
삼성증권 리서치센터 수석연구위원으로 글로벌 소비재 섹터를 담당하고 있다. 2006년 입사 후 리테일 영업과 외화 채권형 상품 운용을 거쳐, 2016년부터 해외주식 컨설팅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부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산관리를 기본 소양으로 여기고, 항상 돈의 흐름을 주시합니다. 참 이상하죠? 자산가일수록 돈을 쓰러 다니고 가난할수록 치열하게 부를 갈구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 반대입니다.지난 16년 동안 투자 컨설턴트로 활동하면서 자산의 크기와 금융지식이 비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산가들의 관심사는 부동산,
본교 물리학과에서 학부 및 석사과정를 마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8년 본교에 부임하여 중성자별과 블랙홀의 성질 연구, 중력파 자료 분석 연구를 하고 있다. 과학과 대중 소통, 시각화를 통한 과학 데이터 활용에도 관심이 있다. 2008~2010년 마리퀴리 펠로우십, 2016년 브레이크스루상(라이고과학협력단 공동수상), 2017년 교육부 학술연구지원사업 우수성과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표창 등을 수상했다.이대 교정에서 가장 추억어린 장소를 꼽아보자면 오후 햇살이 어린 중앙도서관 서가이다. 입학하고 한동안은 잊
아일랜드 코크 UCC 약대에 1학년 재학 중인 신입생 만 28살. 지금의 나를 정의하는 단어다. 한국인의 상식에서는 대학 졸업 후 직장을 다녀야 할 나이건만, 왜 다시 대학으로 향했는지 그리고 또 왜 꼭 아일랜드였는지 궁금하지 않은가?고등학생 시절 나의 1순위 목표는 약대 진학이었다. 당시 약대는 신입생을 선발하지 않고 대학 2학년 이상 과정 수요(예정)자가 약학대학입문자격시험 (PEET)을 응시한 후 오직 편입으로만 입학 가능했다. 분자생명과학부 13학번으로 입학해 2학년 1학기까지 학교를 다니다가, PEET 시험에서 고득점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