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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래전부터 누군가에 의해서 은연중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정형화된 꿈을 복제해가며 살도록 강요당해왔다. 어느 순간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들의 몇몇 성공 스토리는 젊은이들의 꿈을 대량생산해주는 제조공장으로 전락했다. 부모들도 자녀들이 스스로 만든 꿈이 아니라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안전한 꿈을 벤치마킹하고 복제해가며 살도록 부추기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한국사회에서 웬만큼 산다는 부모들은 자식의 재능과 열정이야 어떻든지 자신의 자식이 의사, 변호사, 판사, 공무원 등의 전문직이 아닌 직업을 넘보는 사는 것을 그냥 자유롭게 놔둘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다. 이처럼 누구에 의해서 강요되고 복제된 획일화된 꿈으로부터 나의 꿈을 해방시켜 나만의 꿈을 꾸는 것을 꿈의 민주화라고 부른다. 한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꿈을 만들어 사회라는 플랫폼에서 이것을 구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때 또한 사회는 이런 노력을 적극 지원해주는 시스템을 구축했을 때 다양한 꿈들이 어우러져서 공진화하는 건강한 행복의 생태계가 형성된다. 원래 우리에게 인생의 결승점은 각자의 머릿수만큼 존재해 왔다. 하지만 인생을 먼저 산 소위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이 도달한 종착역만이 진정한 종착역이라고 주장해가며 기득권을 주장하고 이 기득권을 자신의 자식들에게 까지 대물림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만의 종착역을 소리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져갔다. 사람들이 몇 개로 한정된 똑 같은 종착역을 놓고 무한경쟁하기 시작하면서 시기, 질투가 생겨났고 인류의 비극도 시작되었다. 인생의 종착역은 하나라는 주장이 기득권을 성취한 사람들의 음모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내는 순간 이미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고착시키기 위한 시스템인 계층을 만들어냈다. 계층에 편입된 순간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버리고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이 계층에 편입해 들어가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은 기득권이 설정해 놓은 같은 결승점을 향해서 서로 아웅다웅 경쟁하고 서로 시기하고 서로 질투하는 것을 인생의 참모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기득권이 강요한 삶이 고착화 되면 될수록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행복은 점점 꺼져가는 불꽃이 된다. 이미 기득권을 성취한 사람들은 이런 우리끼리의 경쟁을 은밀히 지켜보며 자신들이 만들어 논 계층 질서가 영구히 무너지지 않도록 매일매일 기도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태초부터 누구도 자신의 종착역만이 진정한 종착역이라고 타인에게 강요할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인간은 누구라도 인간으로써 자신만의 삶의 종착역을 주장할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우리가 주장하는 진정한 평등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에게 맞는 꿈을 찾아 날개를 펼 수 있는 다양한 기회의 평등인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며 다양한 꿈을 꿀 때 세상의 다양한 일자리는 다시 만들어지고 공동체에 기반을 둔 행복도 다시 복원될 것이다. 결국 행복의 복원은 개개인들이 다양한 종착역에 대한 믿음을 복원하여 이를 향해 꿈을 민주화 시키는 데에서 시작된다. 꿈을 제대로 민주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 이 일을 성공함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크게 도울 수 있는 것의 세 영역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자신만의 일을 찾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세 영역이 만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없어서 결국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남들의 성공을 크게 도와 줄 수 있는 일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다. 결국 나머지 둘 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먼저 선정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세상은 너무 복잡해져서 예체능의 일이 아니라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만 가지고 성공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오히려 좀 모자라는 재능은 학습욕구를 불태워 그 영역에서 오히려 재능을 가진 사람들보다 큰 성취를 이뤄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왠만한 재능을 대치해줄 수 있도록 기술이 고도로 진화한 현대사회에서는 노력이 가장 큰 재능이다.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자신의 가슴을 오랫동안 뛰게 해서 자신에게 무한한 공짜 에너지를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만들어 준 꿈의 노예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가슴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열정을 따라 자신만의 종착역에 대한 믿음을 복원하고 이를 향한 꿈을 되찾는 순간 떠났던 행복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교수칼럼 | 윤정구 교수(경영학과) | 2014-09-15 21:55

인간은 시간이라는 단위를 만들어 새롭게 시작하는 단위에 ‘새 해, 새 달, 새 날’같이 ‘새’를 붙이고, 새로운 의식이나 다짐의 출발점으로 삼기도 한다. 2014년 9월이라는 것도 흘러가는 시간의 한 과정이지만, 우리는 새 학기의 시작으로 받아들이고, 특히 우리 이화여대의 경우에는 새로운 총장이 새로운 비전으로 새로운 이화를 만들기 위해 새롭게 노력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새 학기라는 표현을 하면서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 준 문화 유산을 생각하면서 새로운 다짐과 각오를 한 번 해 보기를 바란다. 문화 유산은 필자의 전공에 맞추어 우리 조상의 문자 생활에서 찾아 보기로 한다. 고유한 문자를 가지지 못했던(혹은 가졌다 하더라도 없어져 버린) 한국인의 조상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내지 2,500년 전쯤에, 인접해 있는 종족의 문자인 한자를 수용하여 우리말을 표기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어와 중국어는 음운·형태·통사에 있어서 큰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어를 표기하기에는 부적절한 면이 많아 우리의 조상들은 한자로써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해 새로운 용법을 만들어 변용하게 된다. 단어문자인 한자를 빌어와 음절문자식으로 변용하여 표기하기도 하였고(예: ‘都, 古’ 등은 각각 우리말의 ‘도, 고’ 등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 이에서 더 나아가 음소문자식으로 변용하여 표기하였다.(예: ‘ㅅ, ㅁ, ㅂ, ㄴ’ 등을 표기하기 위해 ‘叱, 音, 邑, 隱’ 등을 사용) 이러한 과정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첫째, 고유의 것이 없을 경우에는 차용(수용)하되, 한국적인 실정에 맞게 변용하라. 15세기 동방의 조그만 나라였던 조선에서는 인류의 문자사를 새로이 하는 대단한 창조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훈민정음의 창제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되는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큰 동기는 한자에 의한 문자 생활의 불편이었을 것이다. 인류의 문자사를 새롭게 한 이 창조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둘째, 수용과 변용이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에는 스스로 창조하라.한글에 의한 표기 방법에 대한 논의는 1824년 유희 선생이 에서 시작되는데,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개화기와 일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에는 표기법의 혁신을 주장하는 일련의 학자들과 기존의 표기 방법을 고수하려는 학자들이 수십년에 걸쳐 대토론의 거치게 된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셋째, 실질적인 운용에서는 그것의 기능을 고려하여 혁신하되 충분한 토론을 거쳐라.몇 십년간의 토론 끝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만들어지는데, 이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원리는, 훈민정음 창제 후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만들어지기까지 몇 백년 동안 사용되던 표기의 원리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 원리는 “한글맞춤법은 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중 ‘어법에 맞도록 한다’는 것은 공시적인 음운규칙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형태음소적 표기를 하고, 공시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은 음소적 표기를 함으로써, 언어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규칙과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의 표기방법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이 원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넷째, 실재체의 조화를 꾀하되, 상반된 원리의 균형을 항상 생각하라.외부의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우리의 실정에 맞게 수정하여 수용하고, 외부의 것으로 만족할 수 없을 경우에는 새롭게 창조하고, 과거의 관용에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혁신하되 충분한 토의를 거치고,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조화와 균형이 되도록 하라. 이것이 문자생활을 통해서 우리 조상들이 우리들에게 물려진 문화 유산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이 학기에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한 번 되새기고 가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교수칼럼 | 박창원 교수(국어국문학과) | 2014-09-01 1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