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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써 넣고 보니 무슨 설교 제목 같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세속적 사랑, 곧 연애에 대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믿음’을 이야기한다는 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아픈가가 지적하듯, “사랑에 빠진다는 사건이 모조리 주관화”된 나머지 “사랑 선택이 공동체의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조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 시대에 어떤 믿음을 강요하려는 것인가. 사랑이란 어떤 객관적 근거도 없는 감정이다. 기쁨과 설렘에 가슴 떨리게 하거나 절망과 우울증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만큼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랑은 어떤 증거나 증명, 보증도 작동하지 않는 영역이다. 사랑은 ‘그가 나를/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예감 말고는 어떤 다른 증거도, 확인도, 보증도 없이 시작된다. 그렇기에 사랑에는 끊임없이 우릴 흔들리게 하는 불안이 있다. 그가 나를 사랑할까라는 질문은 계약서나 보증서, 서명 따위로 확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케 그 사랑을 확인했다 하더라도 이 사랑이 언제까지 지속될지에 대한 또 다른 불안이 생겨난다. 지금 사랑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어떤 다른 근거도, 보증도 없는 사랑의 자기충족성은 사랑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논리적 필연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가, 마치 부동산 중개인이 보증한 전세 계약서처럼, 사랑의 지속에 대한 보증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결혼은 부부라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법적 규정으로만 작동할 뿐, 결코 그 둘 사이의 사랑의 지속을 보증해주지 못한다. 사랑했기에 결혼했을 부부들의 이혼율이 이다지 높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사랑예찬?는 사랑을 ‘차이의 진리에 대한 경험’이라 부른다. 사랑은 혼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차이의 진리’의 경험이다. 어떤 근거도, 이유도 없이, 어찌해볼 새도 없이 생겨나는 사랑의 감정은 내가 아닌 타자를 향한다. 그렇기에 사랑은, 아무리 용을 써도 ‘나’가 될 수 없는 그 타자와 나 사이의 ‘차이’에 깃든다. 사랑이 낯선 도시를 방문할 때와 같은 불안과 위험의 요소를 안고 시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조심스럽고 불안한 여정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믿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확인’이나 ‘확증’과는 다른 것이다. 믿음이란 그를 위한 어떤 ‘객관적’인, ‘확인 가능한 증거나 보증’이 없이도 누군가를, 무엇인가의 지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집을 사거나 빌릴 때는 물론, 개인들끼리 물건을 사고팔 때도 계약서, 보증서, 확인서 등을 교환하는 문화에 익숙해진 나머지 점점 그 존속이 위태로워지고는 있지만, 사랑은 이런 ‘근거없는 믿음’을 통해서만 생겨나고 유지되는 관계다. 믿음을 뒷받침할 외적 근거들이 요구되는 계약/교환 관계와는 달리, 사랑관계에서 믿음은 그 믿음 말고는 어떤 다른 근거들에도 의거하지 않는다. 계약서나 보증서가 우리의 불안을 잠재우려면 그 계약서나 보증서의 효력을 담보해줄 다른 사람과 제도의 존재가 필수적이지만, 사랑의 믿음을 위해서는 오로지 서로 사랑하는 두 명만 있어도 충분한 것도 그 때문이다. 계약이나 교환관계에서 쌍방에 대한 신뢰가 보증이나 서명을 완료한 후 효력을 발휘하는 데 반해, 사랑 관계에서 사랑에 대한 믿음은 ‘사랑함’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사랑에 대한 믿음은 오로지 ‘지금 사랑함’을 통해서만 생겨나고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계약금 혹은 저당 잡힐 건물 등을 가지지 못한 사람도, ‘지금 사랑함’을 통해 믿음만 얻는다면 얼마든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바디우가 말한 ‘차이의 진리에 대한 경험’은 사랑과 믿음 사이의 이 수행적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이 경험은 그 어떤 다른 체험들보다 우리의 삶을 값지고 풍요롭게 만든다.

교수칼럼 | 김남시 교수(조형예술학 전공) | 2016-02-29 13:30

곧 어버이날이다. 원래 어머니날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럴 수는 없다는 듯이 아버지도 한자리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관계는 질적으로 다르다. 아이를 가지면 어머니는 몸으로 이를 알기에 모자관계는 명백한 관계다. 그러나 아버지가 한 다리 건너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자식으로 인지해야 부자관계가 성립된다. 미혼모는 아이 아버지가 없어도 어머니로 인정된다. 반면 미혼부가 아버지로 인정받는 일은 지난한 일이다. 가족관계등록법에서도 혼외자의 출생신고자를 어머니로 제한하고 있다.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는 탯줄로 이어진 매개가 없는 관계이다. 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자라서 생모를 찾으러 한국으로 돌아온 사례는 많이 접할 수 있다. 비록 한 때 자기를 어떤 이유로 버렸건 간에 어머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반면에 ‘생부’를 찾겠다고 돌아온 입양아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인지를 매개로 한다. 아버지가 자식을 인지하여 호적에 올리고 성을 물려주면 부자관계가 성립된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누구라도 성을 물려주면 아버지가 된다는 말이다. 게다가 아버지만 자식에게 ‘호부호형’을 허하는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다. 자식에게도 자기 마음에 드는 족보를 꾸밀 권리가 있다. 족보를 만드는 것은 자기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함이다. 그래서 ‘내 아버지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자식인가?’는 자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근본적인 질문이 된다. 프로이트는 신경증 환자들을 관찰하여 이들이 자기 생애를 고쳐 쓰려고 온갖 이야기를 꾸민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중에 이 이론을 원용하여 이것이 바로 소설의 기원이라고까지 말한 사람도 있다. 실제 가정에서는 어머니보다 존재감이 미미한 아버지이지만 소설이나 연극, 영화에서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다루는 작품이 훨씬 많다.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자식에게 명백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자식들이 아버지와 관계설정하기가 힘들고, 훨씬 더 갈등 상황에 노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설이나 연극, 영화에서 아버지가 긍정적으로 묘사된 것은 드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식에게 선험적 존재인 아버지는 과거 가치와 권위의 상징일 수 있고, 이런 이유로 아버지는 자식의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가 될 수 있다. 이럴 때 오이디푸스적 도식에서 친부살해의 테마가 나올 수도 있고, 과거와 단절하고자 하는 열망이 아버지를 아예 내러티브에서 지워버리고 자수성가한 인물이나 고아를 주인공을 내세울 수도 있다. 신분제 사회는 사라졌지만,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아버지의 재력이 또 다른 신분제의 근간이 되었다. 그래서 “아부지 뭐 하시노”란 말은, 자식에게는 헤어날 수 없는 현대판 숙명을 상기시킨다. 아버지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될 경우, 아버지는 자식에게 억압기제로 인식될 수도 있고, 반대로 무능한 아버지의 경우에는 자식의 앞날을 막는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될 수도 있다. 어머니 손맛은 비교가 불가능한 절대적 가치를 가진 것의 상징으로 거론된다. 반면 아버지가 준 세뱃돈이나 크리스마스 선물은 당장 그날로 비교의 대상이 된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바람직한 아버지에 대한 표상이 있게 마련인데, 자식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이와 비교하여 실망할 수 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유산만 남겨주는 것이 아니라 빚도 물려 줄 수 있다. 아버지의 빚을 떠안게 된 자식들은 상속을 거부할 수 있다. 혈연이라는 피의 논리로 아버지와 자식을 숙명적 관계로 묶어 놓던 거대 담론이 사라진 오늘날, 아버지는 더 이상 자식에게 선험적 존재가 아니다. 요즘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버지들이 자식 앞에서 생쇼를 해야 하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반증한다. 자식에게 아버지로 인정받지 못하면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담론을 만든다. 그래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혈연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담론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교수칼럼 | 김도훈 교수(불어불문학과) | 2015-05-04 13:28

어느 방송사의 “배려, 대한민국을 바꿉니다.”라는 캠페인에 귀를 기울입니다. 사람들의 감사한 마음은 오래 가지 않고, 금방 습관화되어 무감각해지는 냄새 같은 것 아닐까요? 은혜는 물에 새긴다 하지 않습니까? 매월 5만원씩 누군가를 도와준다고 합시다. 돈을 받는 사람이 얼마 동안이나 그걸 당연시하지 않고 고마워할까요? 사람은 감사할 일이 계속되어야만 감사한 마음이 계속 유지되고, 또 감사할 일의 형태가 자꾸 바뀌어야만 습관화되지 않습니다. 배려와 선행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 다 감사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만 선행을 하지 않았다고 누구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배려 없음은 간혹 비난 받기도 하고 범죄로 간주될 때도 있습니다. 미국 사막 지역의 고속도로에서 차가 고장 나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모른 체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가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배려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그 사람에게 필요하고 내 처지에서 생각할 때 비교적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나의 행위를 말합니다. 적극적인 친절과 비슷하지요. 배려는 돈이 전혀 들지 않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뛰어 오는 발소리를 듣고 잠시 기다렸다 함께 올라가는 것, 문을 열고 들어 가다가 뒤따라오는 사람이 다치지 않게 잠시 문을 열고 기다려 주는 것, 주차장에서 혼자 차를 밀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 감기에 걸렸을 때 마스크를 착용하고 기침할 때 전염을 염려해 조심하는 것, 길에서 긴급 상황이 발생하여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 운전 할 때 다른 차량의 통행로를 생각하며 운전하는 것, 다른 사람의 행위를 비난하기 전에 그 사람 입장에서 나라면 어찌 행동했을 지를 생각해 보는 것 등, 배려의 상황은 우리 생활 속에 널려있습니다. 사회 통합이 우리 사회의 화두이지만, 그럴만한 여건이 조성되어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서로에게 화가 나서 분이 가득한데 화해가 될까요? 갑은 적고 을은 많으니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갑의 선행을 목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실천하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운데, 사람들이 선행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일까요? 갑이 인색해서일까요? 잠시 조사해 보면, 우리 사회에는 스스로 갑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갑이 거의 없는 사회에서 갑의 도리를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스스로 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갑의 도리를 들려주면 은근히 화만 나지 않을까요? 반면에 을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갑의 도리를 듣게 되면 그 역시 갑에 대해 화가 날 것입니다. 결국 그런 사회에서 갑의 도리를 외치는 것은 오히려 갑을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 되는 아이러니가 만들어 질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심리는 이상한 것이어서 사회문제 해결 노력 중에 이런 이상한 아이러니가 자주 발생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현재 우리 사회는 갑과 을이 서로에게 화가 나있고 미워하는 상태라고 진단합니다. 미운 사람에게 누가 선행을 베풀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셨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반면에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웬만하면 선행을 베풀겠지요. 먼저 사회 통합의 여건이 필요합니다. 사회통합을 위해 좋은 뜻으로 한 말이 오히려 분란과 미움, 갈등을 부추긴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외침보다는 생활 속 습관처럼 베풀어지는 작은 배려들이 답이라고 봅니다. 갑과 을 모두의 몸에 밴 배려와 친절로 인해 상호 간의 모든 미움과 분노가 사라진 후라야 서로가 상대방이 마음에 들 것이고 그 후라야 서로 선행을 베풀고 사라진 갑들이 돌아와 사회통합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차! 저와 생각이 다른 어떤 분은 이 글을 읽고 내심 화가 나실 수도 있겠네요. 그 분께 여쭈어 봅니다. 그러면 사회 통합은 포기해야 하나요? 이 상태 이대로 얼마나 더 갑의 도리를 반복하여 얘기하면 사라진 갑이 돌아올까요? 사회통합 없어도 증세로 해결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현재 상태 그대로라면 증세는 탈세로 이어지고 결국 을에게만 증세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결국은 사랑만이 답이 아닐까요? 꿈 깨라고요?

교수칼럼 | 이영하 교수(수학교육과) | 2015-04-06 1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