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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소셜포비아’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SNS를 통해 만들어진 소셜 네트워크의 잔인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으며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인 흥행을 기록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본 후 필자가 느낀 감정은 ‘오싹함’이었다. 범람하는 SNS의 홍수 속에서 너무나 쉽게, 당연하게 이용했던 SNS가 만들어낸 잔혹사를 보며 결심한 것은 SNS 계정을 삭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SNS 속에 있는 ‘나’를 지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인체 구조 상 평생 스스로의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다. 그렇기에 카메라, 거울 등을 통해 보이는 모습을 조합해가며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간다. SNS도 마찬가지다. SNS 속 ‘친구’, 혹은 ‘팔로워’(follower)들이 SNS 속 ‘나’를 보는 것처럼,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제3자가 되어 본다. SNS의 친구 혹은 팔로워의 수, 자신이 올린 글의 ‘좋아요’ 수와 리트윗(retweet, 인용) 횟수로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SNS는 일종의 ‘거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거울을 통해 보고 싶은 내 모습이 조금이라도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기를 바라며 조금씩 더하고, 많은 부분을 덜어낸다. 필자 역시 그런 SNS 속에 만들어진 ‘나’를 좋아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거울 아래 쓰인 이런 문구를 발견한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거울은 실제를 왜곡한다. 옷 가게의 거울이 우리의 실제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십 장을 찍어 건진 한 장의 ‘셀카’ 사진이 우리의 실제 모습은 아니다. 거울은 좌우 반전된, 혹은 보정되고 왜곡된 모습을 반영할 뿐이다. SNS를 통해 타인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결코 진짜 ‘나’가 아닌 것처럼. 우리는 정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나’를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SNS 속 ‘나’와 내면의 진짜 ‘나’의 괴리에 점점 더 좌절하게 될 뿐이다. 타인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과 실제 내 모습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어쩌면 영화 ‘소셜포비아’를 보고 느꼈던 오싹함은 영화를 통해 그 괴리를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날것 그대로의 나를 보는 방법은 의외로 어렵지 않다. 누군가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SNS 속에서 ‘좋아요’를 눌러주는 이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스스로를 이해하는데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외면은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볼 수 있지만, 그 내면은 자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볼 수 없다. 꾸미고 다듬어진 생각을 드러내는 것에만 익숙해진 우리는 거칠지만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에는 쉽게 겁을 낸다. 그렇지만 그것을 들여다 볼 준비가 됐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제1자’다. 마치 제3자인 것처럼 나의 외면을 파악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내면의 스스로를 보는 것을 겁낼 필요도 없다. 필자는 다시 ‘계정 삭제’ 버튼을 누르기 위해 조금씩 SNS 속 ‘나’를 놓아주고자 한다.

상록탑 | 양한주(편집국장) | 2015-04-06 19:45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하고 싶은데, 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하는 것은 어때?” 최근 대학 입학을 준비 중인 한 수험생 동생이 어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필자에게 한 질문이었다.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전공과목을 독일에서 석, 박사로 이수하는 것이 미래에 훨씬 유리할 것이라며,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독일어를 미리 익혀두겠다는 생각이었다. 즉,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독어독문학 전공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것이다. 필자는 동생에게 단순히 독일어를 구사하려는 이유만으로 주전공으로 공부할 이유는 없다고 설명했다. 어문학을 배우려면 그 나라의 언어가 기반으로 갖춰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넘어 언어학이나 문학을 더 많이 공부하는 학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생의 질문을 듣고 난 후 황우여 교육부 장관의 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지난 2월 전국 대학생 대표자 10여명과 가진 간담회 자리에서 “취업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취업에서 필요한 소양으로서의 인문학, 자기계발을 위한 인문학을 생각해야 한다”고 해 인문학의 위기라며 논란이 일었었다. 다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인문학은 단순히 자기계발, 기본 소양으로 갖추기 위해서만 필요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인문학의 위기를 악화시키는 한 개인의 의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취업을 위한, 몇몇 개인만의 의견이 아니었다. 후에 취업을 하기 위해 언어 구사력을 높이려고 어문학을 전공하는 것도 ‘취업에서 필요한 소양으로서의 인문학’이었던 것이다. 물론 필자도 고등학교 때 불어를 공부했다는 것과, 국제기구의 국제회의 공식언어 중 하나인 불어를 계속 공부하면 사용할 일이 많을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불어불문학과에 지원, 입학했다. 그리고 불어불문학 전공 학생으로서 원문을 읽기 위해 불어공부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서 불어를 배우는 것과 불어불문학을 배우는 것은 매우 다름을 느끼고 있다. 불어불문학에 대해 모든 것을 깨닫고 공부한 학생은 아직은 아니지만 단순히 책을 읽고, 외국인과 말하기 위해서 하는 불어를 배우는 것과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고를 해서 이런 말을 하게 되고 글을 쓰게 되는 지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그 깊이가 다른 것 같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구조 조정을 보면 인문학이 많이 감축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에 반해 인문학 관련된 책은 우후죽순으로 발간되고, 다양한 인문학 강의도 넘쳐나고 있다. 모순되는 상황이다. 오랫동안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는 대학에서의 인문학 전공과정은 사라지고 있고, 단기간에 인문학에 대해 알아보는 기회들만 많아진 것이다. 인문학은 사람에 대해 배워나가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공계열 학문이나 경영, 경제학 등에 비하면 당장의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활용하고 사람 사이에서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고, 그것을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아나가는 인문학이 알아야할 기본 내용이자 가장 중요한 학문이 아닐까.

상록탑 | 김가연(사진부 부장) | 2015-03-30 19:12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두 가지 큰 선택을 했다. 고등학교 입학할 때만 해도 문과로 가겠다고 호언장담했다가 수학 선생님이 좋아 무턱대고 이과로 온 지 벌써 6년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금 필자는 졸업을 두 학기 앞둔 수학과 4학년생이다. 6년 전, 문과가 아닌 이과를 택했던 것이 첫 번째 선택이었다. 2013년 5월, 필자는 이대학보 수습기자가 되었다. 언론이 뭔지, 신문이 뭔지도 몰랐다. 한 교양수업에서 이대학보 선배가 들려줬던 학보사의 이야기가 흥미로워 그 날 밤 인터넷에 이대학보를 검색해보았을 뿐이다. 취재라는 것이 재밌어 보였고 학교생활이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다른 고민은 없었다. 이대학보에 지원했던 것이 두 번째 선택이었다. 우리는 하루 동안에도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오늘 밥 뭐 먹지?’, ‘집에서 과제 할까? 열람실에서 하고 갈까?’, ‘오늘 아침 운동을 가지 말까, 그냥 갈까?’, ‘지금 잘까? 조금 있다 잘까?’ 우리는 순간의 선택에 후회하기도 하고, 순간의 선택이 가져다준 뜻밖의 행운에 기뻐하기도 한다. 여러 개의 선택지 중 어느 하나를 택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저녁 메뉴를 고르지 못해 친구에게 대신 정해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필자도 그런 부류의 사람 중 하나다. 늘 밥을 먹을지, 면을 먹을지 고민하고, 한식이냐 양식이냐 갈등한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메뉴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세 번째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2015년이 되면서 무서워졌다. 눈 깜짝할 새에 4학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4학년이 되면서 전엔 없던 취업이라는 고민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서두에서 언급했던 두 가지 선택과는 달랐다. 이번 선택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고, ‘남들보다 뛰어난 나’를 요구했다. 필자는 아직 준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주변에서 선택을 요구했다. 결정해야 하는데, 선택해야 하는데 ‘대학원 진학’, ‘기자’, ‘은행원’ 등 각종 직업 정보가 적혀 있는 취업 메뉴판을 손에 들고 있던 필자는 올해 초 어떤 것도 택하지 못하고 놓아 버렸다. 그런 와중에 서점에서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이야기」를 발견했다. 책에 필자의 마음을 빼앗은 구절이 있었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 구절이 아직 선택을 하지 못한 우리에게 하는 조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도 선택을 하지 못했고, 아직 백지라는 것이 막막하다. 하지만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백지라서 막막한 것이 아니라 백지이기 때문에 종이 안에 어떤 것을 채워 넣어도 괜찮다는 뜻이 된다. 백지 속에 어떤 그림도 그릴 수 있고, 그림이 그려지는 방향으로 선택을 하면 될 것이다. 백지여도 괜찮다는 용기 그리고 나를 믿는 고집이 있으면 된다. 시작은 지금부터니까. 이제 필자에게 세 번째 선택을 할 용기가 생겼다.

상록탑 | 박진아(사회·문화부 부장) | 2015-03-23 19:42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하략)’ 김춘수 시인이 현재 10대, 20대가 되어 자신의 SNS에 이 구절을 적었다고 상상해보자. 이 글에 누군가는 “헐, 오글거려”라고 댓글을 달 것이다. 이른바 ‘쿨병’의 시대다. 대중의 쿨함이 정도를 넘어서 병적인 수준에 달했다. 타인의 감성을 ‘오글거린다’는 말로 쉽게 짓밟을 수 있는 시대다. 타인의 감성을 ‘중2병’, ‘오글거림’ 등의 단어로 쉽게 재단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감성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금기시하는 분위기다. 진지하게 또는 감성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쿨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 손가락질 받는 대상이 되었다. 쿨함이란 감정에 얽메이지 않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태도를 의미한다. 하나의 상황에 대해 계속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쿨’하게 털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쿨함은 생활에서 분명 필요하다. 때로는 한 가지를 붙잡고 고민하기보다는 잊고 다시 일어나는 태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쿨함은 정도를 넘어선 순간 타인의 태도를 무시할 수 있는 무기가 되어버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글거린다’는 표현의 남용이다. 그 내용에 관계없이 감성을 드러내는 이들이 ‘쿨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이들의 감성은 이 같은 단어로 가볍게 치부되거나 조롱의 대상이 된다. ‘오글거린다’는 표현은 어느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만연하기 시작했다. 최근 인터넷에서 이 표현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2000년대 말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이 표현은 ‘어떠한 표현이나 행동을 보았을 때 낯간지럽거나 민망할 경우’를 의미하지만 최근에는 조금이라도 감성적인 것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오글거림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지나친 진지함을 참을 수 없다고 말한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을 진지하게 표현하는 상황이 민망하다는 것이다. 매사에 진지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진지해도 될’ 상황에서 조차 오글거림의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 책이나 영화에 대한 감상, 자신의 개인적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 사회현안에 대한 개인의 의견 등 표현해야할 상황에도 오글거림을 들이민다. 보는 내가 ‘오글거린다’는 이유로 타인의 표현을 금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같은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그리고 이를 표현할 기회를 박탈한다. 표현하고 싶어도 표현하지 못한다. 쿨함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타인이 ‘오글거린다’며 손가락질 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오글거림의 늪에 빠져 감성을 자신의 속에 가둔다. 그러나 오글거린다는 손가락질이 두려워 ‘쿨함’의 늪에 빠지면 안 된다.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감성’이다. 우리 마음속에 울림을 주는 것 역시 ‘감성’이다. 우리는 자신의 감성을 충분히 표현해야 한다. 이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한 가지 권하고 싶다. 어느 날부터 당신 속에 가둬진 감성을 밖으로 꺼내볼 것을.

상록탑 | 민소영(대학취재부 부장) | 2015-03-16 12:19

직접 그 입장이 돼 볼 것. 제법 익숙한 말이지만 막상 실천으로 옮기기에는 너무나도 어렵다. 수많은 ‘보통’ 사람들은 겉으로는 타인에 대한 포용과 이해를 추구하곤 하지만 막상 다른 누군가를 평가할 때는 철저히 자신의 시각 속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알아 가면 갈수록 자신과는 차이점이 많은 타인을 자신의 입장, 환경을 기준삼아 바라본다. 필자는 이러한 태도를 일종의 ‘폭력’이라고 일컫고 싶다. 사실 필자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어느 덧 이대학보에 들어온 지 횟수로 3년.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이곳 편집국에서 자그마치 세 번이나 보냈다. ‘직접 그 입장이 돼보지 않고서는 모른다’는 수습기자, 정기자, 차장기자, 부장기자 그리고 이제 이대학보에서의 마지막 직책인 편집국장을 끝마치며 얻은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와서 솔직히 말하는 것이지만 이대학보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때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하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매주 한 호의 기사방향을 결정하고 이끌어 내야 하는 입장임에도 그 역할에서 타의에 의해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부분은 대학 신문이기 때문에 조금은 더 봐줄 수도 있는 것이고 충분히 융통성 있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됨에도 ‘넘을 수 없는 벽’은 필자 스스로를 탓하게끔 하기도 했다. 한 해 동안 벽을 넘고자 필자는 노력했다. 뛰어도 보고, 돌아가려도 해보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왜 항상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일까. 이 수많은 잡념 끝에도 답을 찾지 못했다. 이는 편집국장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나도 ‘행복한’ 편집국장이 되고, 기자들 또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편집국장이 되리라고 결심했던 필자에게는 너무나 초라한 감정이었다. 이번 호를 끝으로 필자는 편집국장의 무게를 내려놓는다. 그간 필자를 고민하게 했던 넘을 수 없는 벽은 언제고 다음 편집국장 앞에 나타날 수도 있다. 임기 동안 넘을 수 없는 벽을 정말로 넘지 못해서 속상한 마음보다는 후배의 짐을 덜어주지 못했다는 마음이 여전히 필자를 괴롭힌다. 넘지 못했던 벽처럼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이들의 행동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일수도 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믿고 챙기며 살아가기에도 버거운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다른 이의 입장에 서서 오롯이 그를 바라볼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심지어 아직 어린 학생들한테 조차도 타인에게 쉽사리 믿음을 주지 말고 오직 너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가르치는 시대에 말이다. 결국 이렇듯 여유가 없는 팍팍한 삶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사랑하기보다는 역설적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에 과도한 가치를 부과하게 되는 듯하다.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사로잡혀 결국 못 속으로 뛰어들어 죽음에 이른 나르키소스처럼, 당장 눈앞에 비친 자신의 입장과 생각에 사로잡혀 다른 이를 함부로 평가하는 것은 결국 자기 스스로를 고통 속에 빠트릴 수 있다. 이제라도 누군가에 대해 논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그들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고자 노력하는 것은 어떨까.

상록탑 | 박예진 편집국장 | 2014-12-01 20:40

법률의 힘은 위대하다. 하지만 필봉(筆鋒)의 힘은 더욱 위대하다. -괴테 지난 10월2일, 언론과 권력간의 관계를 다룬 영화 ‘제보자’가 스크린에 올랐다. 영화 속에서는 진실을 말하려는 자와 이를 막으려는 자가 끝없이 대립했고, 진실은 영영 사라질 듯 보였다. 하지만 힘든 투쟁 끝에 언론이 세상에 진실을 알린 극적인 순간, 필자는 통쾌하기보다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졌다. 어쩌면 필사적으로 진실을 담으려던 기자, 그 펜(pen)의 무게에 감정을 너무도 이입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를 불편하게 했던 펜의 무게를 직면했다. 본지가 진행하던 독자위원회에서였다. 독자위원회는 6일~27일(목) 정기적인 토론을 통해 3년간의 의 내용을 분석, 평가한다. 우연의 일치로 독자위원회가 평가하는 신문은 필자가 이곳에 몸 담았던 기간과 일치했고, 그 결과 필자는 3년간의 흔적을 타인의 눈과 입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타인의 눈과 입이 말하는 필자의 흔적은 예상치 못한 만남처럼 낯설었다. 기사 하나하나에 대한 기억이 사진처럼 선명하다가도 어느 순간 현상(現像)이 잘못된 부분 마냥 뿌옇고 모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간만에 먼지 낀 앨범을 꺼내 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오래 전부터 글을 좋아했던 필자에게 글은, 지극히 사적인 대나무 숲과 같은 존재였다. 글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하는 행위로 느껴졌다. 그러던 중 대학에 들어와 학보사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필자의 글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됐다. 그리고 대중에게 글이 공개된다는 부담감은 필자로 하여금 가느다란 펜촉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그 펜촉의 끝에서 필자는 ‘기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비록 ‘학생’기자라는 반쪽짜리 신분이었지만 미지의 누군가가 글을 읽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상상만으로도 기분 좋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필자를 자극했고, 그 미묘한 자극은 필자를 3년 째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치 술에 잔뜩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취객처럼 황홀하게, 가끔은 어지럽게, 그렇게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동안 이화를 누빈 필자의 글이 이화인 개개인에게, 더 나아가 학교 전체에 어떤 의미가 됐을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글에, 기사에, 펜에는 그 무게가 있다. 이러한 무게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그 무게에 짓눌려 숨을 쉬지 못한 적도 있었고 펜 끝에서 느껴지는 책임감에 종종 괴로운 눈물을 흘렸다. 호기롭게 학보사에 발을 디디던 시절을 원망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전히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화자의 모습이 있었다. 필자는 올해로 3년째 에 몸담고 있다. 그리고 이번 여섯 번째 상록탑 칼럼을 마지막으로 퇴임을 앞둔 상태다. 3년간 감당해 온 펜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펜의 끝에서 시작되는 진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길고 긴 문장 끝에 잠시 그 펜을 내려놓으며 필자는 말하고 싶다. 괴테의 말은 진정 옳았노라고. 마침표 하나조차 그 무게가 있었노라고.

상록탑 | 조윤진 편집부국장 | 2014-11-24 11:41

“당신이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면 진짜로 그렇게 된다” “장애물이란 목표에서 눈을 돌릴 때 나타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이지성의 「꿈꾸는 다락방」, 두 번째는 이민규의 「생각이 답이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표현 방식은 달라도 말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목표에서 눈을 떼지 마라. 2005년 「마시멜로 이야기」를 필두로 자기개발 도서 읽기 열풍은 「시크릿」을 통해 정점을 찍었다. 전 세계 소수만이 아는 ‘부와 성공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던 이 책은 국내에서 출간 8개월 만에 120만부 이상 팔리는 히트를 쳤다. 지난 7월 28일 교보문고에서 발표한 상반기 베스트셀러 집계 상위 50위에 속해있는 자기개발 도서만 20권이다. 에세이집에 최상위 순위를 밀리긴 했지만, 아직 출판계에서 자기개발 도서는 건재하다. 어떤 자기개발 도서도 그 주제는 대충 ‘시간 관리’, ‘긍정적인 마음’, ‘실천’. 이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표지만 다르고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사랑하라, 저축하라 등 누구나 알만한 이야기를 20대에 꼭 해야 할 50가지로 선정해놓기도 한다. 마치 50가지 다 못하면 실패한 20대를 산 것 처럼. 자기개발 도서를 좋아하는 필자의 친구는 ‘앞으로는 이렇게 살아야지’라는 나름의 다짐을 다이어리에 기록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행동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얼마 후 그 친구는 서점으로 가서 새로운 자기개발 도서를 고른다.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반복되는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자기개발도서의 인기를 보여준다. 왜 사람들은 자기개발 도서를 찾을까.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출판 업계의 흐름을 분석한 「베스트셀러」에 따르면 자기개발 도서 열풍은 ‘절대 고독의 개인’ 출현에서 비롯됐다. 1987년 6월 항쟁, 1997년 IMF 체제를 겪으면서 현실 개혁에서 자기개발로, 희망 없음으로 급변한 대중의 심리변화를 출판 서적이 포착해온 것이다. ‘절대 고독의 개인’이 정말 이 책을 통해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는지는 미지수다. 자기개발 도서의 내용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일종의 점(占)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개발 도서들이 독자들로부터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 인기는 오히려 개인이 자신의 고민 속에 숨어버리려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한다. 결심한 바를 실천할 용기도 없으면서 자기개발 도서가 주는 일시적인 공감에 매료돼 계속 비슷한 위로를 찾아 헤매는 것 말이다. 혹시 서점에 갈 때마다 자기개발 도서 코너를 떠나지 못한다면 이제는 그 순환에서 빠져나오길 바란다. 공감 가는 구절을 SNS에 올리면 ‘내 고민은 남들이 알아주겠지’하는 것은 허세다. 자신이 변하지 않는 한 자기개발서는 무릎팍 도사가 돼줄 수 없다. 얼마 전,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소설가 고혜정은 “50점 맞을 것이 두려워 시험을 보지 않는다면 100점을 맞을 가능성도 없어진다”고 했다. 행동하는 것이 두려워 자기개발 도서가 주는 달콤한 위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발전은 없을 것이다. 이에 필자는 과감하게 ‘지금 읽고 있는 그 자기개발 도서를 버려라’고 권하고 싶다.

상록탑 | 박예진 편집국장 | 2014-11-17 14:02

2014년이 두 달이 채 남지 않은 11월 중순, 학교 곳곳에 총학생회 및 단과대학, 학과 학생회 후보를 알리는 자보가 가득 붙었다. 새로운 후보들이 곧 다가올 2015년의 계획을 고민하는 지금, 현재 임기에 있는 대표들은 어떠할까. 선거가 진행되는 지금, 아직 임기가 남은 현대표와, 선거운동을 하는 후보들은 동상이몽을 꾼다. 많은 것을 준비하는 의욕적인 후보들과 달리, 현대표들은 책임을 후임에게 떠넘기려 하는 것이다. 일명 ‘레임덕(lame duck)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레임덕 현상은 집권 말기에 나타나는 정치 지도자의 지도력 공백, 통치력 저하 현상을 말한다. 임기 만료를 앞둔 공직자의 정책집행이 일관성이 없고, 그에 따라 불안한 국정상태가 나타나는 것을 기우뚱거리는 절름발이 오리라고 일컫는 말이다. 또는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한 경우 의회와의 관계에서 불리한 입장이 돼 지도력이 저하되는 현상을 일컫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한정된 임기와 임기 후의 권력 상실로 인해 정권교체 현상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교내 많은 대표들도 임기 말인 요즘 자연스럽게 레임덕 현상을 겪을 수 있다. 그들의 임기는 1년으로 한정됐고, 임기 후에는 단순히 일반 학생으로서 그들의 권력 또한 상실되니 레임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임기를 마무리하는 때 새로운 대표들을 뽑기 위한 선거관리 위원으로 일하며 대표로서의 일을 잠시 내려놓는다.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자신을 대신할 후보를 보면서 현 대표들은 자신들이 짊어왔던 짐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여유를 찾았을 것이며,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했을 때부터 그들이 원하는 변화를 짧은 기간에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 시도조차 안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의 임기는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총학생회와 단과대학 및 학과 대표가 선발되기 전까지, 완전히 그들의 임무가 새 대표들에게 넘어가기 전까지 그들은 학생들의 대표이다. 약 1년간의 시간 동안 많은 사업을 진행했겠지만 결과를 거두지 못한 것 또한 많다. 현 총학생회인 ‘시너지 이화’도 1학기 대비 2학기에 상대적으로 적은 사업들이 진행됐다. 학생식당 개선운동처럼 협의회까지 짧은 기간에 진행한 사업도 있지만 아직도 지켜지지 않은 공약들이 많다. 총장과의 면담도 총장이 참석하지 않아 학생들과의 토론회로 대체됐고, 그 결과 ECC 사물함 추가 배치 등이 요구돼지 못했다. 또한 이화사랑 테이블 및 의자 교체, ECC와 중앙도서관에 위치한 열람실 공기 청정기 추가 설치 등의 공약은 요청 예정에 있다. 총학생회 외에도 이러한 상황에 놓인 대표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임기 말에 선거가 이루어지면서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은 한정된 임기를 가진 대표자가 피할 수 없다. 선거는 2주 후면 끝이 나고 2015년을 이끌어나갈 대표가 출마된다. 현 대표들은 눈앞에 놓인 끝을 느끼겠지만 바라던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공동체를 위해 몇 걸음 디딘 것에 만족하지 말고 끝까지 열심히 걸어나가야한다.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많은 대표들이 강력한 의지로 레임덕 현상을 극복하고 안정적인 지도력을 보여주길 바란다.

상록탑 | 김가연(사진부 부장) | 2014-11-10 13:55

생각할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은 정해져 있고다른 선택의 기회는 없는가끝없이 줄지어 걷는 무표정한 인간들 속에 나도 일부일 수밖에 없는가 -N.EX.T, Destruction of the Shell: 껍질의 파괴 마왕이 떠났다. 80~90년대 대학생들의 마음을 뒤흔들던 그가, 의식불명이 된 지 6일 만인 27일 눈을 감았다. ‘마왕’ 혹은 ‘교주’라고 불리며 지금까지도 그 시절 3040세대의 문화를 대표하던 그의 별세 소식에 대한민국 전체가 추모의 물결에 젖어 있다. 빈소는 외롭지 않았다. 28일~30일 송파구 아산병원 장례식장 내 마련된 빈소에는 발인 전까지 약 2만 여명의 조문객이 몰렸다. 특히 그와 청춘을 보냈던 30~40대 팬 조문객들이 퇴근시간인 5~6시에 집중적으로 방문해 마지막 날에는 24시간 조문이 가능하도록 빈소가 개방되기도 했다. 조문객들은 “나의 청춘의 한 페이지가 찢겨나간 것 같다”며 애도를 표했다. 신해철이 본격적으로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시작한 것은 1988년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 이후였다. 마지막 참가번호 16번, 서울대표로 화려하게 등장한 밴드 ‘무한궤도’에서 그가 불렀던 ‘그대에게’는 당시 대학 캠퍼스 라디오 방송을 가득 메우며 당시 청춘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신해철은 밴드 N.EX.T를 결성하고 솔로 활동을 하는 등 당시 억압적인 사회 상황에서 그 시대 청년들에게 숨통이 트이는 탈출구를 제공했다고 평가 받는다.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멜로디언을 불어야 했던 신해철을 살린 것은 또래 대학생들의 문화였다. 그는 음악을 하는 것을 반대하던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이 ‘대학가요제’였다고 말했다. 청년들은 대학가요제 등을 통해 그 세대의 문화를 발굴하고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러나 지금, 대학문화를 알리며 나아가 문화 전반을 이끌던 대학가요제는 올해 폐지가 확정됐다. 대학가요제 폐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단순히 프로그램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대학 전반의 문화가 침체돼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대학가요제 폐지는 상업문화와 구분되는 청년문화의 실종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학가요제 폐지를 아쉬워하며 ‘대학가요제 Forever'라는 이름의 공연을 하는 ‘대학가요제회’의 회원들도 현재 대학생인 이들이 아닌 이제는 기성 가수가 된 이들이다. 현재 대학생인 청춘들은 관심이 없다. 대학가요제가 폐지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대학문화가 사라지고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는 이제 너무 식상한 이야기가 됐다. ‘대학생’이라는 단어에 담겨있던 젊음, 열정, 창조 등의 의미들은 이미 취업, 스펙, 면접 등의 단어로 얼룩졌다. ‘대학가요제’ 대신 ‘취업콘서트’가 열리고, 학생들은 ‘밴드 사운드’ 대신 ‘스펙 동아리’에 가입한다. 대학문화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는 현재, 지금 우리의 모습을 청춘으로 기억하게 될 10년, 20년 후에는 과연 신해철 같은 인물이 존재할까. 지금 그의 빈소에서 눈물을 흘리며 청춘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을 그제야 돌아보게 될 지도 모른다.

상록탑 | 천민아(사회국제부 부장) | 2014-11-03 13:37

“외국인과 수다 떠는 프로그램은 많았지만 진지한 주제를 두고 토론해 본 적은 없었다는 거죠.” 지난달 JTBC ‘비정상회담’ 취재 중 ‘프로그램의 강점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한 패널이 이렇게 답했다. 돌이켜보니 그나마 국민들에게 인지도가 있던 외국인 프로그램은 ‘미녀’들이 ‘수다’ 떠는 프로그램뿐이었다. 비정상회담과 미녀들의 수다(미수다)는 제목만 놓고 봐도 대화의 급이 달랐다. 한때 대표 외국인 프로그램이었던 미수다는 왜 수다에 그쳤을까. 지난 9월15일 본지에 보도된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선 이화 G6의 비정상회담’ 기획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러한 생각은 더 깊어졌다. 본사 내부적으로도 취재 과정에서 남녀비율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과정이 있었다. 결국, 여자 5명, 남자 1명으로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독자 반응도 좋았다. 기존 방송 프로그램에서 여성외국인이 출연해 수다만 떨었던 것과는 달랐다. 같은 외국인 소재를 놓고 드러나는 프로그램 간 차이는 남성과 여성 영역을 이분화 하는 사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역사학이나 사회과학에서는 산업화나 도시화에 의해 성인 남성의 공적 영역과 어린이, 여성과 연관된 사적 영역의 분리가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남자는 사회에 진출하고 여성은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선입견이 이러한 분리의 대표적 예다. 남자들의 이야기는 회담으로 쳐주지만, 여성의 이야기는 수다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름답다는 조건을 붙인 제목에서도 또 다른 한계가 드러난다. 비정상회담에서 ‘잘생김’은 회담 테이블에 앉는데 필요한 조건이 아니지만 미녀로서 외국인 여성은 남성 소비자에게 시청 되는 대상에 머물러 있다. 비정상회담에서 남성이 각국을 대표하고 의견을 내세우는 주체로서 나타난다면 미수다에서 여성은 남성시청자의 취향에 맞춰진 미녀, 한국 남자친구에 종속된 객체로 등장한다. 실제로 프로그램에서 인기를 끌었던 많은 외국인 여성패널은 방송 이후 섹슈얼리티를 강조한 화보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양측 프로그램은 다루는 주제나 형식 자체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비정상회담에서는 정장을 갖춘 각국 대표 남성이 토론 테이블에 앉아 각국의 결혼문화, 한국의 서열문화 등 비교적 진지한 주제를 다룬다. 반면, 미수다에서는 관객을 향해 정면으로 앉은 아름다운 외국 여성들이 한국 남자친구와 갔던 데이트장소, 한국 남자가 좋은 이유 등 주로 흥미 위주의 가벼운 소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렇게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정형화된 성적 이미지는 대중에게 영향을 끼쳐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특히 비정상회담에는 여성이 부재하기 때문에 미수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던 성 대상화 등의 담론에서 비껴가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여성이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물음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아마 ‘왜 제작진들은 회담이라는 형식에 여성 패널을 캐스팅하지 않았을까? 회담이라는 공적영역에 여성을 한 나라의 대표로 세운다는 것은 아직 낯설기 때문이진 않을까?’라는 질문이 될 것이다.

상록탑 | 김지현(문화학술부 부장) | 2014-10-06 10:08

얼마 전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가 종영했다. 이 드라마에서 정신과 의사인 여주인공은 어린 시절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는 어머니의 모습을 목격한 이후로 남자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불안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녀뿐만 아니라 남주인공 또한 의붓아버지에게 항상 매를 맞는 어머니와의 기억, 의붓아버지의 죽음 등 과거의 상처 때문에 정신분열증을 가지고 있다. 이 둘 외에도 드라마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다. 정신과 의사마저도 앓고 있는 마음의 병. 이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마음의 상처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가정에서의 문제, 친구 또는 이성 관계에서의 문제, 입시, 취업 스트레스 등 우리 마음에 상처를 낼 요소는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이 마음의 상처를 빨리 돌보지 않으면 병이 된다. 지난 14일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한국 성인의 우울증상 경험' 보고서에서 19세 이상 성인의 12.9%는 최근 1년 안에 우울증을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성인 8명중 1명꼴로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여성이 우울증을 경험하는 비율은 남성보다 1.8배 높은 16.5%로 나타났다. 이처럼 마음의 병은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질병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난 상처를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경우가 많다. 질병관리본부의 조사에 의하면 우울증 경험자 중 정신건강 상담을 받은 사람은 10명 중 한 명 꼴이었다. 주변의 시선, 사회적 편견 때문에 자신의 마음의 병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감기에 걸려 몸이 아플 수 있는 것처럼 마음도 당연히 아플 수 있다. 이를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불안장애를 가진 여주인공과 정신분열증을 가진 남주인공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방법은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노력으로 자신의 상처를 이겨내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 입시, 취업 등의 이유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지치고 아프다. 우리 모두 ‘행복’이라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우리가 행복함을 느끼는 주체인 ‘마음’에게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는가. 행복의 열쇠를 쥐고 있는 마음을 너무 방치하진 않았나. 하루하루 살기 바빠 자기 자신에게 무관심해지지 말고, 자신의 마음에 한번 관심을 기울여보자. 마음의 상처가 덧 나 큰 병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괜찮아, 사랑이야’ 마지막 회에서 조인성이 이런 말을 한다. “오늘 굿나잇 인사는 여러분이 아닌 저 자신에게 하고 싶네요. 저는 그 동안 남에게 괜찮냐는 안부도 묻고, 잘자라는 굿나잇 인사를 수도 없이 했지만 정작 저 자신에게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여러분도 오늘 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너 정말 괜찮은지 안부를 물어주고 따뜻한 굿나잇 인사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밤은 남이 아닌 스스로에게 인사를 해보자. 그럼 오늘 밤도 굿나잇... 이화인

상록탑 | 조은아(대학취재부 부장) | 2014-09-29 0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