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해가 지는 곳으로(2017)태어났으니 그저 살아갈 뿐인 나는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같은 존재론적 질문 앞에서 말문이 턱 막히곤 한다. 핑계는 고리타분하다. 경쟁과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점철된 대한민국에 사는 탓에 삶, 탄생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찰해 볼 시간이 없었다고. 마치 “일을 하지 않으면 금방 가난해”지므로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을 포기해야 했”던 ‘류’처럼 말이다. 찰나뿐인 철학적 사유는 명확하게 매듭지어지지 못하고 모호하게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내가 조심스레 말하건대, 인간이 저마다의 불행을 끌어안고서
몇 주 전 다른 대학에서 진행한 교양교육 포럼에 참석했다. 교양교과의 방향, 의사소통 교육, 소프트웨어교육 등 포럼의 중요 주제를 듣던 중 공통적으로 등장한 화제가 있었다. 장안의 화제가 된 CHATGPT가 그 주인공이었다. 특정 키워드를 제공하면 AI가 참고자료를 추출, 검토하여 원하는 분량의 글을 쓰기도 하고 음악을 만들기도 했으며 프로그램 코드를 간결히 짜기도 했다. 관련 자료를 소개한 연사는 직접 CHATGPT를 사용한 결과를 보여 주었다. 특정 주제로 글쓰기를 지시하자 순식간에 그럴듯한 글이 나왔다. 허술한 부분이 많았어도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이대학보입니다.지난 학기 발행을 마무리하며 마지막 인사를 전한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개강을 목전에 두고 다시 인사드립니다. 다들 새로운 학기 잘 준비하고 계신가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대학보사 밖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4년 만에 대면으로 열린 입학식 때문이죠. 대강당을 향하는 설레는 발걸음을 보니 이번 학기가 유난히 밝고 활기차게 시작하는 느낌입니다.최근 이대학보에는 기쁜 소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저희 기자들이 시사인 대학기자상을 수상했다는 것인데요. 지난 학기 이대학보
열한 살,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시절. 새로운 가족을 처음 만났다. 갈색 파마머리를 가진 작은 푸들. 이름은 초리. 그 아이는 자연스레 유‘리’의 동생 초‘리’가 됐다. 언제나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던, 아침마다 방문을 긁으며 찾아오던, 늘 내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던 아이.우리는 함께였지만,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흘러갔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대학생이 됐지만, 아기 강아지였던 초리는 노견이 됐다. 살이 찌기 시작했고, 아픈 곳이 늘어났다. 어느 날은 문득 초리를 볼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섭고
점점 따뜻함이 품 안으로 스며드는 계절이다. 10월의 끝자락에 디뮤지엄의 ‘어쨌든 사랑 : Romantic Days’ 전시를 친구와 같이 보러 갔다. 순정만화를 모티브로 가져온 작품들이 많았는데, 순정만화를 보고 자란 세대가 아니었기도 했고 에로스적인 사랑은 그다지 감흥이 없어서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시험 기간이 이제 막 끝나서 지친 상태임에도 얼굴을 보자고 달려온 친구와 함께한다는 사실이 내게 더 가까운 따뜻함이었다.내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해주고, 내가 아플 때 걱정해주고, 종종 잘 지내는지 연락하는 따뜻한 챙김이 나에겐
80일. 터무니없이 짧아 보이는 시간이지만 거의 한 학기에 다다르는 시간이다. 어느새 영국 땅을 밟은 지 80일이 됐다.지낼 수 있는 기간의 절반이 넘어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제는 귀국 날까지 남은 시간보다 이곳에서 보낸 날이 더 길어졌다. 크리스마스를 주축으로 긴 방학을 가지는 유럽은 12월 초가 지나면 학교에 간다는 느낌도 희미해진다. 그렇게 계산해보니 내게 남은 시간은 2주 남짓. 내 인생의 거창한 전환점이 되리라 예상했던 교환학생은 별것도 없이 막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교환을 가기 전, 이미 갔다 온 수많은 사람에게 조
드라마/구미호뎐(2020)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존재는 언제나 호기심을 자극한다. 가령, 심해 깊은 곳이나, 광활한 우주 너머에는 무엇이 존재할지에 관한 생각들은 항상 매력적인 이야기 소재가 돼왔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구전되어오는 괴담도 그러하다. 괴담에 등장하는 요괴, 귀신, 괴물 등은 일상에서 비켜나 비일상의 영역에 위치하는 신기하고 기이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언뜻 보면 이질적으로 느껴지지만, 우리의 상상력과 가치관이 반영된 존재들이기도 하다. 드라마 ‘구미호뎐’은 한국의 설화적 세계관 속 비인간적 존재들을 그들만의 방
이번 학기부터 학부생을 대상으로 여성학 수업 가운데 를 가르치고 있다. 노동운동에 대한 대학사회의 관심이 1980~90년대와는 상당히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취업을 준비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장기화되고 있어 학생들의 처지는 상당히 힘겨운 상황이다. 취업을 할 수 있는가, 혹은 언제 할 수 있는가, 과연 자신이 원하는 곳에 취업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이슈로 부상한 지도 이미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여성노동 이슈에 관심을 갖고 문제의식을 심화할 수 있도록 무엇을 질문하고 무엇을 논의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대학보입니다.어느덧 이번 학기에 전하는 마지막 인사입니다. 편집국장으로 칼럼을 쓰기 시작하며 여러분께 어떤 말로 첫 인사를 드릴지 고민하던 날이 생생합니다. 매번 독자 여러분께 편지 한 통을 함께 보낸다는 생각으로 한 자 한 자 적어보았는데, 저의 생각이나 마음이 잘 전달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대학보는 이번에 발행되는 1653호를 끝으로 2022년 발행 일정을 마칩니다. 그동안 학교 곳곳을 뛰어다니며 취재하느라 바쁜 일상을 보낸 이대학보 구성원들에겐 이번 주가 나름 큰 의미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특히 이
대학생은 과도기적 단계이다. 입학했던 당시를 돌이켜 보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또는 또 같이 별생각 없이 이대에 들어왔다. 나는 내가 싫어하는 걸 억지로 시키면 차라리 죽고 싶은 사람인데, 그런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며 입시를 할 당시 미래에 대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부터 뚜렷한 미래의 스케치를 가진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나는 정말 고등학교 이후에 대한 기대가 아무 것도 없었다.입학한 후에도 큰 자유가 찾아온다거나 특별한 해방감, 소속감과 안정감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첫 1년은 코로나가 심각해 배달 음식을 주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는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온플법)'을 만들어 온라인 플랫폼의 시장 독과점 및 플랫폼 자체 브랜드를 우선 노출하도록 알고리즘을 조작하는 등의 불공정 거래를 막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온플법'이 덩치가 작은 국내 기업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낮추고, 기존 시장 규제법과 중복으로 규제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대 의견이 제기되며 입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에 대한 법적 규제, 어떻게 생각하나? 온라인 플랫폼 규제법 제정에 대해 찬성한다. 온라인 플랫폼의 시장 독과점은 플랫폼
본교 수학과를 1981년 졸업하고 동대학원 전산학 석사, 미 매사추세츠공대 전자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큐어소프트 부사장, 파수닷컴 부사장직을 거쳐 2019년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 3대 이사장으로 취임해 3년간 활동했다. 2019년부터 세계여성이사협회(WCD Korea) 비상임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정부의 IT국제표준화전문가(2001~2005년)로 선정됐고 ISLA국제보안전문가상(2015년), 여성정보인대상(2019년) 등을 수상했다.여러분은 혹시 ‘공대 아름이’라고 들어보셨나요? 2008년 한 통신사가 공과
지난 13일, 내 생일을 맞아 코트를 사고자 가족들과 백화점 나들이를 나갔다. 하지만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옷의 가격대가 지나치게 높았다. 오빠는 “여자 옷은 잘 몰랐는데, 질도 별로 안 좋으면서 비싸기만 한 게 많다. 너는 괜찮은 옷 사려면 나보다 돈을 2배는 내야 할 것 같다.”며 혀를 찼다. 남성 의류보다 여성 의류가 질과 가격, 두 가지 면에서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힘들다는 사실이 그는 나름 충격적인 것 같았다.우리는 이따금 일상적인 소비에서 성차별을 마주한다. 기장이 비슷한데도 남녀 요금을 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공기 냄새가 바뀐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훅 찬 바람이 파고들며 풍겨오는 쌉싸름한 비릿한 냄새. 나는 이걸 ‘수능 냄새’라 부른다. 수능이 끝난 지 3년이 지났지만, 매년 찾아오는 이 계절의 수능 냄새는 잊을 수 없다. 시간은 언제나처럼 무심하게 지나가고, 나는 예전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에도 말이다.과거의 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찾아볼 거라나. 경계의 그늘진 구석을 외면하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비틀린 사회의 균형점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학창 시절의 수많을 밤을 지새웠던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2015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7년 9월부터 본교 철학과에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독일에서 출판된 『Erfahrung und Atmung bei Heidegger(하이데거 철학에서 경험 개념과 숨 개념)』, 역서로는 한병철의 『선불교의 철학』, 하이데거의 『예술 작품의 샘』, 『철학의 근본 물음』, 칼 야스퍼스의 『철학적 생각을 배우는 작은 수업』이 있다. 현재 한국 하이데거 학회 및 Heidegge
영화/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후회의 순간들이 쌓여 삶을 이룬다. 삶은 매 순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를 두고 “이 순간 이랬더라면”이라고 반추하며 나아가지만 돌이킬 수 없다. 수업에 지각했을 때 일찍 잤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사소한 것부터 어릴 적 꿈을 되돌아보며 포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상상하는 것까지, 크고 작은 후회와 이루어지지 않은 여러 가능성으로 삶이 구성된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 에블린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늘 좌절과 실패의 경험이 축적된 인물로 묘사된다. 이토록 아무
2022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이동권 시위가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시민들이 시위를 통해 직접적인 손해를 입으며 ‘멈춤’에 대한 새로운 공론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전장연은 열차 출입구를 막는 방식으로 지하철 운행을 지연시키며, 원하는 대로 이동하기조차 어려운 장애인 이동권의 현실을 파격적으로 알렸다. 전장연의 행동에 공감한다고 말하는 시민이 있는 반면 전장연 이동권 시위를 두고 일각에선 부정적인 반응을 쏟아냈다. 접근성 낮은 교통시설물과 예산 부족을 문제 삼으며 이어 나간 이 시위가 최근 다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
이대학보 선배님들이 그렇게 빵빵하다며?!내 장점이 뭔지 알아?! 바로 학보인거야~️학보는 학보가 가장 잘 아는 법!이번엔 학보 선배님들이 전하는 학보이야기! 늘 진심을 다하는 학보사 기자들의 진솔한 학보생활을 담아보았습니다. 기획 | 이대학보 미디어부촬영 | 최예원 황지원 정지현 허윤제작 | 최예원 황지원 정지현 허윤 ☞ 이대학보 신입기자 모집 안내 바로가기
드라마/작은 아씨들(2022)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하는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이 22년 10월 9일 12부작으로 끝을 맺었다.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 내던져진 자매들은 여전히 우애가 좋지만, 소설 속보다 현실적이고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과 영화에서 여러 번 합을 맞춘 정서경 작가의 두번째 드라마로, 미술감독 류성희까지 합류해 세간에서는 ‘박찬욱 없는 박찬욱 팀’이라고도 불리운다. 현 사회의 문제점을 냉철하고도 아름답게, 그러나 어딘가 찜찜하게 묘사하는 박찬욱 영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드라마라고 할
침잠하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관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매 새벽, 잠에 들지 못하거나, 잠을 자지 말아야 할 때마다 멸망하고 있는 한 세계의 낭떠러지에 서 있는 방관자가 된다. 나를 지탱하고 있는 이 가느다란 한 폭도 언젠가는 끊어질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부서지고 있는 것들을 다만 목도하고 무력해 한다. 그 연쇄를 끊어낼 수 있었던 적이 없다.여느 밤과 새벽이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늘 그렇듯, 가로선들과 어지러운 스캐치들을 바라보며 이것들을 끼워맞춰보려 한다. 나의 의지에 따라 나타나는 방향들과 음형들. 나타난 것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