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몬트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낸 지 70일이 되어가는 지금,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꼈다. 교환학생의 생활 중 여행이 아닌 실제로 미국 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문화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의견을 표출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 점이 어떻게 보면 한국의 대학교와 굉장히 상반되고 문화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생각이 들었다.“What is your pronoun”이라는 질문은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듣고, 왜 물어보는지 의문이 들었던 질문이다. 학기 초에 오리엔테이션에서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해야 할
드라마/브러쉬업라이프(2023)“지금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해본 적 있는 생각이다. 정말 이 기억과 지능을 그대로 유지한 채 아이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하게 될까. 그리고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브러쉬 업 라이프’(2023)는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 주인공이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 일본 드라마다. 드라마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청에서 일하는 주인공
어딘가에 마음을 쏟는 것. 마음을 쏟기 시작하면, 그에 대한 세계가 확장되고 그 펼쳐진 세계 속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인지하게 된다.나는 마음의 한 켠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쉽게 말해, 그냥 정이 많다. 정도 많고 정을 주는 것도 좋아한다. 비록 마음이 자리잡기까지는 더딘 편이지만 지속력은 길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무엇이던 간에 한번 마음을 붙이기 시작하면 온기가 도는 느낌을 받고는 하는데, 그 온기는 나의 많은 부분들에 영향을 미친다.최근 나는 공간으로부터 받는 많은 감정들을 경험했다. 새삼스
3월 중순, 꽃샘추위가 내려앉으니, 거리에 다시 눕시(Nuptse)가 늘어난다. 등산용품 회사 노스페이스(The North Face)에서 만든 짧은 패딩 눕시. 지난겨울에도 이게 교복인가 싶을 정도로 사방이 눕시였다. 눕시 사랑은 옷 좀 입는다는 셀럽들로부터 시작해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세대도 뛰어넘고, 서울이고 뉴욕이고 동서양도 인종도 모두 뛰어넘는다고 한다. 롱패딩 유행이 엊그제 같은데 눕시가 유행하는 바람에 엄마, 아빠들은 졸지에 아이들 입던 롱패딩을 물려 입고서 노스페이스 매장에 들어가 카드를 긁었다. 눕시 유행에 힘입어 노스
김소영(디자인·22졸) 아모레퍼시픽 제품디자이너본교 시각디자인과를 2022년 졸업하고 아모레퍼시픽에서 3년 차 그래픽/제품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디자이너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편견이 가득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부정부터 하고 싶지만 솔직히 나의 경우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나 자신이 개인주의적 성향이 너무나도 강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회사는 끝나지 않는 ‘팀플 지옥’과 같다고들 하는데, 나처럼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은 사람이 어떻게 회사에서 디자이너로서 살아가고 있는지 삶과 고민을 글로
추락의 해부(2023)‘추락의 해부’(2023)를 정성일 평론가의 해설을 곁들여 관람했다. 그의 해석을 인용한 대목에 *표시를 남겼다.개가 공을 굴린다. 공이 낙하한다. 이윽고 아버지가 추락한다. 다니엘의 절규가 이어진다. 영화는 추락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추락의 해부’(2023)는 단연 물리적인 하락만을 논하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아버지의 죽음이 타살인가 자살인가, 어머니가 유죄인가 아닌가(gulity not guilty)를 다루는 작품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가정에 닥친 심리적 추락을, 그리고 그 파동에 대한 우울한 회복의 과정
가족 사회학, 생애주기 및 세대 분야의 전문가. 본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에모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인간 행위와 사회 구조』, 『여자들에게 고함』, 『사랑을 읽는다』가 있고 그밖에 공저로도 다수의 책을 썼다. 세계일보, 동아일보, 이투데이 등에 칼럼을 연재해 오고 있다. 그의 ‘인간 행위와 사회구조’ 강의는 2020년 케이무크(K-MOOC) 최우수강좌로 선정되기도 했다.최근 모임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에겐 버려야 할 두 마리 개가 있고, 키워야 할 두 마리 양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덧 스페인에 온 지 10주가 넘게 지났다. 서울과 8시간이 차이 나는 마드리드는 날씨부터 음식, 생활 방식 등 많은 것이 다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는 대화에 관한 것이다. 대화를 여는 방식부터 하는 이야기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스페인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스페인에 거주하는 인구 중 17.23%는 이민자라고 한다. 사실 스페인에 잠시라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단골 과일 가게 사장님은 모로코인, 지금 거주하고 있는 집의 주인아주머니는 콜롬비아인, 시내 젤라토 맛집의 점원은 프랑스
책/권태(1999) 삶이 너무나 허무해 모든 일이 무용하고, 덧없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고, 그럼에도 여전히 할 일은 해야 하는 시간이 싫어진 때. 기쁘지 않아도 웃어야 했고, 쉬어가고 싶어도 쉴 수 없었다. 그대로도 좋다는 얘기나,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는 말들도 큰 위로가 되진 않았다. 치, 남의 일이니까 쉽게 말하는 거겠지.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글들은 많지 않다. 때로 글들은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지나치게 이성적이라서 독자가 자꾸만 감정을 제약하게 한다. 여기서는 슬퍼야지, 기뻐야지.
스페인어에는 ‘좋아한다’라는 동사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겠지만 사실이다. 대신에 Me gusta, 직역하면 ‘나에게 즐거움을 주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가 곧 내가 좋아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손바닥 속 화면에서 스페인어 강사는 이것이 스페인어 역구조를 이해하기에 가장 기본이 되는 단어라는 간단한 설명으로 강의를 마무리했지만, 나는 이 표현을 알게 된 이후부터 내 감정이 의심스러워져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을 머뭇거리게 되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한 것이 나에게 정말 즐거움을 주는가? 좋
‘아기가 된 기분이다.’ 내가 교환학생을 오고 한 달 동안 일기장에 가장 많이 쓴 문구이다. 교환학생으로 간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중의적인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모르겠는 환경에 던져진 아기처럼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이고, 또 다른 의미는 내가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던 알을 깨고 다른 세상에 나와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나는 오래전부터 미국에서 공부해 보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미국에서 학생으로 생활해 보고 싶었고, 미국 교육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개강 주간이다. 매 학기 개강을 맞이하지만, 유독 이번 학기는 학교에 생기가 가득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강의가 병행되던 시기가끝나고 상당수 교양과목과 인문대 전공과목의 강의실로 사용되는 학관이 문을 연 후 맞이한 첫 번째 3월 개강이라 그런 듯하다. 이제야 비로소 긴 코로나 시기가 끝나고 신입생을 맞이한 것만 같다.코로나 시기 동안 대학은 강의만이 아니라 학생들의 각종 대면활동들을 어떻게 원활히 진행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한 반에 배정되면 1년간 일상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는 고등학교 시절까지와는
본교 학부에서 영어영문학을, 통번역대학원에서 통역을 전공했다. 2013년 대학원 졸업 후 7년 반 정도 프리랜서 한영 통역사로 활동했다. 3년 반 전부터 인하우스 통역사로 일하고 있다. 통역사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까? 인공지능(AI) 시대에 앞으로도 통역사가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통역사라는 직업이 궁금한 이들을 위한 정보와 함께, 11년차 통역사로서 숨가쁘게 살아오며 느낀 소회를 적어보려 한다.통역사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소통을 돕는다. 주인공보다는 보조자 역할을 한다. 행사MC를 맡는 등 특수한 경우가
전 중앙일보 대기자. 본교 교육학과를 1987년 졸업하 고 동대학원 석사, 서울대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32년간 기자로 일하며 온 라인 편집국장, 논설위원, 콘텐트랩 실장 등을 역임했 다. 2011년 단편소설 ‘흘러간 지주’로 등단해 소설가 로도 활동하며 『이대 나온 여자』, 『적우: 한비자와 진시 황』, 『카페 만우절』, 『여류 삼국지』 등 작품 다수를 썼다. 2022년부터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객원교수로 일한다. “교회엔 성인과 함께 가고, 술집엔 술꾼과 간댔는데, 지옥에서 마귀들과 함께 다니는
보는 순간 ‘내가 평생 이 기억으로 살아가겠구나’ 하는 순간이 있다. 마드리드의 햇살이 내겐 그랬다.마드리드에 오게 된 것은 찰나의 선택 덕분이었다. 처음엔 축구를 좋아해 유럽에 교환학생으로 오고 싶었고, 그중에서도 학생 신분으로 살기 좋다는 독일을 꿈꿨다. 독일을 목표로 토플을 공부하고, 학점을 맞추고 파견교 목록이 정리된 엑셀을 훑었다. 다른 학생들처럼 파견 보고서와 블로그 등을 살펴보며 목록을 추렸고, 우선 지망을 전부 독일로 채웠다. 그러다 우연히 어떤 블로그에서 ‘노는 걸 좋아하면 독일 말고 스페인으로 가세요’라는 글을 보
책/내게 무해한 사람(2018)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두 번째 소설집인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 최은영은 유약했던 어린 시절의 마음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누구보다도 사랑이 가득한 이들을 그려낸다. 순간의 실낱같은 감정을 잡아채어 유려하게 늘어놓는 문장들을 읽고 있자면 곱씹을수록 청춘에 가까운 문장들이라 생각하게 된다. 마음에 지는 흉터들을 용납할 수 없어 타인을 대하는 데 지나치리만큼 세심하고 예민하게 구는 시기이자, 자신이 누군가의 하루를 망치진
고민 많은 나는 별것도 아닌 일을 크게 부풀려서 걱정하는 아주 몹쓸 재주가 있다. 이 정도면 재주가 맞다. 밖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면 순간 ‘어, 뭐지… 저거?’ 하는 생각을 필두로 ‘전쟁 난 거 아니야? 아닐 거야. 무슨 이벤트 아닐까? 불꽃놀이일 거야. 소리가 너무 가깝게 들리는데? 지금 집에 라면 있나? 우리 가족은 대피 가방도 준비 안해놨는데. 대피하려면 가방이 몇 개 필요할까? 라면은 얼마나 넣어야 하지? 옷들은? 하… 큰일 아니어야 하는데, 정말 걱정이다…’ 이렇게 걱정들이 내 머릿속으로 끝도 없이 쏟아져 들어온다.
“교수님 MBTI은 뭐세요?!” 한동안 사적으로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이제 자기보고서 문항을 통해 개인의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주는 MBTI는 일상의 문법으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입사지원 시 지원자의 MBTI 유형을 가지고 자기소개서 작성을 요구하고, MBTI가 특정 유형인 경우 지원하지 말라는 채용공고를 해서 사회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이쯤 되면 MBTI 광풍, 바야흐로 MBTI 전성시대다.그런데 뿐만이 아니다. MBTI 못지않게 혈액형과 사주(四柱), 타로점, 각종 심리
테넷(2020)‘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껴라.’라는 이 대사는 '테넷'이 얼마나 복잡하고 난해한 플롯의 구조를 지닌 영화인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영화는 사물의 엔트로피 역행에 기반한 ‘인버전’ 기술을 중심으로, 여러 양자역학과 물리학의 개념을 도입하여 서사를 전개한다. 영화 속 어려운 과학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관객이 자신의 영화를 두고 이처럼 고민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영화가 선사하는 새로운 영화적 경험을 체험하고 등장인물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의 철학적
이 기사가 공개될 무렵이면 내가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온 지 80일도 넘어가게 된다. 한국에서 나는 쭉 부모님과 함께 살아서 기숙사 생활을 해본 적도, 자취 경험도 없었다. 그런 내가 용감하게도 홀로 외국에 나온 지도 이제 삼 개월을 채우게 되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신기하고, 스스로 뿌듯해지기도 한다. 처음 교환학생을 준비할 때, 당연히 걱정이 많았다. 이렇게 오래 외국에 나와본 적은 물론, 한국에서도 혼자 생활해 본 적이 없으니 두렵기도 했다. 나는 집안일에 서투른 데다 생활력이 떨어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때문에 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