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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박정희 억지미화 조중동과 관제언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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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등록일
2009-10-27 11:35:10
조회수
7746
“사실을, 진실을 보도해주십시오”
기자협회보 | 기사입력 2006.11.09 11:30


-이수길 박사께서는 1960년대 한국 간호사 독일 파견 사업이 국내에서 왜곡되고 있다고 주장하시고 계십니다.

(앞서 말한 대로)간호사 파독은 독일 주정부는 물론, 김형욱 부장과 이만섭 의원의 도움으로 제가 보사부와 직접 교섭해서 추진한 일입니다.그런데 한국 중소기업의 독일 투자를 알선하는 일을 하던 P모씨가 이 사업을 자신이 박 대통령에게 건의해서 이뤄낸 것이라고 자서전에서 주장했습니다 당시 독일로부터 상업차관을 얻는데 광부, 간호사를 독일에 보내 그 월급을 코메르츠방크에 입금시켜 담보를 대신했다는 거죠.

그런데 이건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독일 차관은 1961년 12월 재건 차관 명목으로 집행됐습니다.1억5천만 마르크였죠. 그런데 이건 장면 정권 때부터 추진된 겁니다. 재건 차관은 한국을 포함해 32개 약소국에게 지급됐습니다.1억5천만 마르크 중 7천5백마르크는 현금 무이자로 빌려줬고, 나머지는 독일에서 재건에 필요한 물품을 사가는 대신 재정을 보증해주는 형태로 지급됐습니다. 그러니 별도의 담보나 보증이 필요 없었죠. 광부와 간호사들의 월급을 담보로 차관을 받았다는 건 맞지 않습니다.

또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에 왔을 때 환영 나온 광부와 간호사를 보고 눈물을 흘리자 뤼프케 당시 서독 대통령이 눈물을 닦아주며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일화도 소개되고 있는데요.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당시는 간호사 파독 전이라 간호학교에 다니던 학생들 몇십명 밖에 없을 때입니다.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이동원씨도 한 신문사에 기고한 글에서 이후락 비서실장이 독일 방문 뒤 독일 정부의 영접이 형편없었다며 주독 대사를 해임시키려 해서 마찰이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만큼 대접이 좋지 않았다는 얘기죠.(시사저널 850호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의 만남은 공식 만찬 한번 밖에 없었다고 보도했다)

P씨도 작년 11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인정했습니다.그러나 그의 왜곡된 주장을 2003년 국내 모 유력 일간지 칼럼에서 K 논설주간이 그대로 받아쓰기도 했습니다. K 전 육사 교장도 2004년 육사 졸업식 연설에서 이 일화를 인용했고요.

-그렇다면 왜 왜곡이 이뤄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간호사 문제를 통해서 박정희 신드롬을 만들려고 하는 거겠지요.

-올 1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동백림 사건에 대한 진상을 조사해 발표했는데요, 발표 내용은 사실입니까

동백림 사건 당시 자신을 취재한 기자는 한명도 없었다는 이수길 박사는 언론에게 진실과 사실을 보도해줄 것을 당부했다.
.
맞습니다.당시 북한이나 동독을 드나들며 실정법을 위반한 사람이 있었던 건 사실이죠. 그렇지만 그걸 너무 과장했다고 봅니다.그러나 진상 발표 뒤 피해자들에 대해서 아무런 보상이나 조처가 없었습니다.전혀 무고한데도 납치돼 고초를 겪은 저를 포함한 5명에 대한 언급도 별로 없었습니다.그중엔 이미 죽은 사람도 있고요. 간호사 출신인 P씨는 동백림 사건 뒤 뒤 한국 사람과 교류를 끊고 일본인, 중국인과 결혼해 살았습니다.물론 한국에도 못 나오고 있습니다.한번 간첩으로 몰리면 무혐의 처리가 돼도 회복되기가 어렵습니다.그들의 삶을 보상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당시 유학생들은 국가적 엘리트들이었습니다.귀국했으면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죠. 그런 사람들의 인생이 동백림 사건으로 어긋나게 된 겁니다.저도 검정시험 자격 의사로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독일에 가서 대학 학위를 받고 귀국하려 했던 겁니다.그 사건 이후 전 독일 국적을 취득했습니다.군사정권 아래서 누가 내 신분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도 그렇고 그 뒤로도 많은 간첩단 사건이 발표됐습니다.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어떻게 느끼십니까.
동백림 사건 2년 뒤 소(小) 동백림 사건(1969년 국회간첩단 사건을 말함)이 터집니다.당시 공화당 국회의원이었던 김규남과 법학자인 박노수가 간첩으로 몰려 사형까지 당합니다.중앙정보부에서 살해당한 서울대 최종길 교수(1973년 의문사)도 동백림 사건의 여파로 비극을 맞았습니다.이 사람들도 매우 억울했을 겁니다.간첩단 사건을 보면 언론이 정부나 당국의 발표와 주장을 그대로 받아쓰는 게 대부분입니다.그게 진실이라고 볼 수 없거든요. 자체적으로 취재를 해서 진실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주시죠.
변호인단을 꾸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계획입니다. 일생을 국가를 위해 공헌하려 했는데 오히려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남은 문제가 해결되면 여생은 조국에 돌아와 살고 싶습니다. 보상금을 받는다면 한독협회와 한국기자협회에 전액 헌금할 생각입니다. 언론이 제대로 보도했더라면 이런 고통이 없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공정 보도를 해달라는 바람에서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언론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올바른 역사를 알려주십시오. 진실을, 사실을 보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동백림 사건이란
1967년 7월8일 중앙정보부는 일부 독일 및 프랑스 유학생 및 교민이 북한의 공작에 따라 반국가 간첩 활동을 벌였다고 발표했다.혐의자 명단에는 음악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시인 천상병 등이 포함됐으며 최종 34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중 정규명 정하룡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들에 대해 간첩죄는 적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1970년 8.15를 맞아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형 집형을 모두 면제했다.


http://media.daum.net/society/media/view.html?cateid=1016&newsid=20061109113019593&cp=journalist
작성일:2009-10-27 11:35:10 61.97.31.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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